내 나이가 어때서

2020년 1월 2일

by 알로

Ep.1


얼마 전 한국생활을 접고 해외로 떠난 선배를 만났다. 그는 한때 내로라하는 기자였다. 반반한 얼굴, 뛰어난 취재력, 묵직하게 세련미 있는 글솜씨까지. 그가 가는 곳은 늘 소문이 따랐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퇴서를 내민 그는 회사를 떠났다. 현장에만 있었던 탓일까 몇 안 되는 살림살이를 종이 상자에 담아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주차장에서 그가 남긴 말은 의외였다.


"정말 이 회사에 들어와서 남은 건 하나도 없구나. 배웅해줘서 고맙다."


그날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있었다. 그는 직업적인 면에서는 이른 출세를 했지만, 늘 외로워했다. 그만둘 무렵엔 루머마저 나돌았다. 떠도는 가십거리에 난 귀를 닫았다. 일적으로 존경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떠나간 그는 수년에 걸쳐 석사과정을 밟았고 고군분투 끝에 미국의 한 연구소에 취직하게 됐다. 한숨 돌리러 한국에 나왔다는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밝았다.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다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오, 잘됐다 진짜. 어떤 사람이에요?"

"내가 지금 지내는 학교 도서관 사서야. 금발머리의..."


나이가 꽤 어리다 했다. 대학생이라 했으니 20대 초중반이 아닐까 싶지만 묻지 않았다. 선배는 서른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친했다면 꼬치꼬치 캐물고 장난도 쳤겠지만, 내게 그는 어려운 선배였다. 그저 묵묵히 그가 털어놓은 연애사를 듣고 있었다.


"내가 가장 행복한 건 뭔지 알아? 이 나라에선 나이가 없다는 거야. 여자 친구는 나한테 한 번도 내 나이를 묻지 않았어."


"진짜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게 너도 나도 한국에서 살아왔으니까 당연한 것 같지만 이 친구들한테는 아니더라고."


"자유롭네요. 그러면 몇 살이면 결혼해야지, 집 있어야지, 뭐 이런 기준도 없어요?"


"그렇지. 우리 부모님도 다행히 나한테 결혼하라는 압박을 주시진 않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한국에 있었으면 내 나이면 결혼도 직장도 생각해야 되잖아. 여기는 전혀 없어. 정말 프리해."


나에겐 믿기지 않는 상상 속의 삶. 그가 누리는 자유란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었다. 공인으로서의 삶, 삼십 대 중반의 남성이 이 사회에서 짊어질만한 무게, 그 모든 걸 훌훌 털고 떠난 그는 당분간 한국에 돌아올 일은 없을 거라 못을 박았다.


새해를 맞이하고 오늘 첫 출근을 했다. 아침에 샤워하러 들어간 화장실에서 문득 내 나이를 체감했다. 몇 년 전 떠나간 선배의 표정과 몇 달 전 선배의 표정이 오버랩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나도 선배처럼 나이로 가늠하는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다.


불임을 걱정하는 미혼여성들이 너도나도 난자 냉동에 도전한다는 기사. 생각보다 비용이 저렴했어요. 이제 안심이 돼요. 38살까지는 가능하대요. 줄줄이 나오는 인터뷰들이 포털 사이트 1면을 뒤덮었다. 난자 냉동도 유행을 탈 수 있는 건가, 의아하면서도 노산을 대비한 30대 여성들의 철두철미함을 써 내려간 기사를 읽으며 나는 이미 조금씩 위축되고 있었다. 아이를 낳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아직 결혼도 안 했고 냉동난자를 준비할 만큼 자금의 여유가 없는데 나이는 노산을 향해가고 싶다는 것. 그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욕심을 버려야 하는 걸까. 아직 잘 모르겠다.






Ep.2


출근할 때마다 마주치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분은 우리 집 앞 소문난 맛집의 주차관리를 해주시는 분이다. 방송 몇 번 탄 것도 이유겠지만, 워낙 한결같은 마인드로 장사하시는 집이라 이보다 더 붐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어죽집이다. 오죽하면 맞은편 문 닫은 식당으로부터 부지를 사서 전용주차장까지 만들었을까.


수백 평쯤은 되어 보이는 주차장을 관리해야 하니 직원이 상주해야 된다. 직원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와 주차를 관리해야 한다. 그러니 마트를 갈 때도 배드민턴을 치러갈 때도 출근할 때도 그 직원과 마주쳐야 하는 것이다.


늘상 이쁘장하게 화장한 얼굴로 또각또각 부츠를 신고 출퇴근하는 모습만 보시던 그분은 매번 다른 멘트로 인사를 건네주시는 분이었다. 오늘은 연예인 패션이신가요. 오늘은 너무 춥네요. 오늘은 어디 가시나요. 오늘은 손님이 많네요. 출근하시나요?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전 날 숙취로 부스스한 머리, 맨발에 슬리퍼, 대충 걸쳐 입은 패딩 모습의 난 집 앞 편의점에 라면을 사러가는 길이었다. 내 머릿속엔 오로지 편의점에 삼양라면이 있을까? 짜왕은 없을까? 신라면을 먹을까? 뿐이었다. 셋 다 없어 결국 안성탕면 하나만 덜렁덜렁 들고 오는데 저 멀리서 나에게 시선이 고정된 그분이 서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멀리서부터 빤히 쳐다보다 말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됐을 때 그가 운을 뗐다.


"맙소사..."


멋쩍었다. 아니 뭐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할 말이 없어 그냥 웃었다.

그가 갑자기 묻는다.


"20대시죠?"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글쎄요"


"20대 맞으시죠? 20대니까 그러고 다니시죠. 하하하"


"글쎄요"


그 한 마디가 하루 종일 맴돌았다. 오래간만에 20 대란 달가운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나이를 가늠하는 단서가 피부와 주름, 인상이 아니구나. 물론 그것도 한몫하겠지만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가늠하는 사람도 있구나.


그게 왜 그날의 희소식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지만 그 한 마디가 내겐 위로가 되었다. 철없는 행동을 하면 20대로 보이는 외모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은 건지 (사실 그게 큰 듯하다), 쌩얼에 부스스한 머리가 20대의 당돌함으로 보였단 사실에 기뻤던 건지. 어쨌거나 난 아직 20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Ep.3


그래서 생각해본다. 왜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 이리도 목을 매는지. 또래가 살아가는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 불안해지는지. 조금 더 당당해져도 괜찮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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