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작과 끝

2020년 1월 2일

by 알로

요즘 넷플릭스에서 빠져보는 미드가 있다. 사브리나의 오싹한 체험. 반 마녀인 사브리나가 그린데일이라는 마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건데 나만 몰랐지 꽤나 유명한 건가 보다.


11화는 시즌1의 마지막 화였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보려고 아껴뒀던 에피소드였다. 사브리나는 평생 마녀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기 위해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그러니 나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사브리나는 오늘부로 마녀가 된 것이다. 동시에 오랜 연인이었던 하비에게 헤어짐을 고한다. 하비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마녀가 되는 것 뿐이었고 막상 마녀가 되니 인간인 하비에게 줄 상처가 두려웠던 사브리나의 선택. 사브리나는 연인과의 헤어짐에 울부짖으면서도 끝내 명부에 이름을 올린다. 시작과 끝은 그렇게 같은 지점에 서있는 것이었다.


아는 동생 한 명은 오늘부로 전역했다. 며칠 전부터 인스타에 전역일 디데이를 세던 그였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그가 몇 시간 뒤면 전역할지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의 스토리엔 매일같이 전역 날짜가 떠있었다. 막상 전역한 오늘, 요란할 줄 알았던 그의 피드는 고요했다. 저녁무렵 그의 스토리에 올라온 곳은 헬스장이었다. (그는 체대생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운동하는 사진을 올렸다. 마치 어제도 그제도 이곳에 있었다는 듯. 군대 가기 전까지 일상이었던 그의 공간은 전역과 동시에 또다시 일상의 시작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러운 듯.


흔히들 말한다. 끝났다고 슬퍼하지 마. 또 다른 시작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말처럼 의연하게 덤덤하게 시작과 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과 시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시작과 끝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 시작하면 끝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끝이 나면 시작이라는 느낌과 덜 연결되는 듯 하다. 그래서일까. 오늘 그곳에 모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늘의 끝을 어떤 시작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할말을 잃은 듯 했다.


오늘은 앵커의 마지막 날이었다. 상암에서의 뉴스 진행은 31일을 끝으로 매듭을 지었다. 새해가 밝고 연일 일산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던 신년 토론.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고 동시에 앵커가 스튜디오에 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날이기도 했다.


화면엔 패널들과 앵커, 방청객만이 보여졌지만 수많은 방송장비 뒤에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엔 많은 이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평상시처럼 현장에서의 할 일을 다했고 어떤 이들은 커피를 홀짝거리며 바닥 한 번 스튜디오 한 번 화면 한 번 무거운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조금이나마 기록으로 넣어두기 위해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말없이 두 시간 내내 같은 자세로 서서 스튜디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모르겠다. 거기 서있는 나조차도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방송이 끜나갈 무렵 적지 않은 이들이 눈물을 훔쳤다.


끝났다. 이로써 끝이 나버렸다. 분명한 건 끝이라는 게 참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알고도 모르는 것처럼 훅 다가온다는 것. 그 순간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어쩌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방송에 서기 위해서, 한 방송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수많은 손길을 거친다. 손짓 하나, 아이디어 하나, 문장 하나, 디자인 하나, 땀 한방울까지. 먼지 하나 정장에 묻어있어도 카메라 돌아가는 사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누군가의 손길이 뻗친다. 그러니 오늘은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끝을 삼키고 시작을 열었을 거다.


그러니 내겐 오늘이 12월 31일인 것이다. 새해는 내일부터다. 어떻게 다가올지 몰라 조금 두렵지만 이젠 또다른 시작을 받아들일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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