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랑 직업을 말하지 마세요

말하면 강퇴당합니다

by 알로

연말에 용기를 냈다. 수년 전부터 눈독 들이던 글쓰기 클럽에 가입한 것. 강남과 망원에 거점을 두는 이 클럽은 철학, 글쓰기, 독서, 토론 등으로 정해진 요일과 시간대에 만남을 가진다. 한 달에 두 번. 원하면 본인이 신청한 모임 외 다른 모임에 놀러 갈 수 있다. 천체망원경으로 별보기, 도자기 빚기, 그림 그리기, 뜨개질하기. 다양한 취미 모임도 추가로 가질 수 있다. 글쓰기, 생각해오기, 책 읽기 등 각 모임마다 미션도 수행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게 무료는 아니다. 입이 떡 벌어질만한 금액도 아니지만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기엔 선뜻 용기가 안 나는 금액이기도 하다. 3개월 동안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공간 (을 이곳에선 거실이라 부른다)이 있다는 건 특별한 소속감을 부여해준다. 참여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무한한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 투자한 돈만큼 얼마나 얻어가느냐가 관건이다.


이 모임의 규정은 딱 하나다. 나이와 직업을 말하지 말 것. 괜찮은 아이디어다. 나이와 직업을 말하지 않고 나를 15초 동안 소개한다는 건 생각보다 머리를 많이 굴려야 하는 행위였다. 의미 있는 숫자를 제시해 나에 대한 글을 그 자리에서 써본다는 것. 모두에게 내가 쓴 글을 공유한다는 것. 그 모든 과정에 나의 직업과 나이는 비밀로 지켜져야한다는 것. 여간해서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합평처럼 비난과 지적질이 오가지 않는 대신 앉은 사람들 모두가 귀를 기울여 나의 장점을 발견해준다. 나처럼 혼자 쓰고 혼자 묵히는 글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신선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나이와 직업에 대한 정보를 발설하는 게 금지돼있지만 역으로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점이 재밌다. 자리에 앉아 초면인 사람들과 이 모임 처음이세요? 아니요, 저번 시즌에 들었어요.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정보를 나누다보면 자연스럽게 서로가 궁금해진다. 나보다 어릴까? 무슨 일을 할까? 숫자에 약하다면 이과는 아니겠지. 아침을 꼭 챙겨 먹는다면 요리를 한다는 거겠지?


온갖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꾹꾹 눌렀다. 제발 경청하자.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자. 장장 3시간 동안 내가 발언하는 게 1이라면 8은 남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나도 저랬지, 나는 어땠나, 저 사람은 저렇게 했구나, 다음 차례가 오면 이런 걸 말할까?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잡생각을 몇 번 터뜨렸는지 모른다.


한 친구가 말한다. 3살 때 부모님이 피터와 늑대 CD를 틀어줬다. 그때마다 무섭다고 울었다는데 난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도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치 내가 정말 기억하는 것처럼 생생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다.


이 귀여운 이야기를 듣는데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어처구니없게도

'아니, 3살 때 CD가 있었다고? 잠깐만 CD가 처음 나온 게 언제였더라...'


또 한 친구가 말한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네이버 아이디에 생일인 숫자 14를 넣어주셔서 그때부터 아이디에 14가 들어가요. 그래서 14를 좋아해요.


'잠깐만... 초등학교 때 네이버가 있었다고? 난 초등학교 때 천리안 누리텔 뭐 그런 이름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아니야 지금 그거 생각하는 시간 아니야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나는 나이가 말해주는 숫자에 민감해져 있단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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