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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화기 너머로 당신이 얼마나 큰 사고를 당했는지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얼마나 힘든지 분단위로 달라지는 아픔의 강도와 들쭉날쭉한 감정들을 세세히 늘어놓으셨다. 벌써 세 번째다. 나도 같은 경험이 있어 잘 안다며 얼마나 무서우셨을지 이해한다고 세 번째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신뢰하시는 서울대병원에서 '이석증'이라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자 다시 이야기는 사고의 시점으로 돌아갔다. 통화는 2시간을 넘어가고 우리 고부의 대화는 무한 반복이다.
석 달 전 어머니는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다 뒤로 크게 넘어지셨다.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전후 맥락 없이 탁! 하더니 수초 후 정신을 차리자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머리 뒤쪽에 난 큰 혹과 함께 어지럼증이 심해졌다며 이건 필시 뇌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 당신은 확신하셨다. 그때도 나는 이석증이 재발해서 쓰러지셨을 거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럴 리 없다며 밤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들어봄직한 병들을 나열하며 불안해하셨다. 병원 예약까지 근 한 달을 약도 드시지 않고 그 아픔을 생으로 견뎌내셨던 것이다. 검사결과가 당연히 이석증임에도 어머니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으셨다.
원래도 두서없이 오늘과 과거, 미래가 뒤섞인 이야기를 풀어놓으셨지만 어지럼증이 심해지신 이후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 간극이 더 커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만다. 잠시 멍해진 틈에 갑자기 호통이 날아왔다.
"너 그 머리 당장 잘라라! 알았어? 당장 잘라서 깡충하게 하고 화장도 해서 좀 이쁘게 하고 다녀!"
나이 오십에 내 머리를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령으로 잘라야 하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머니와 20년 넘게 살갑게 지내면서 웬만한 호통에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겼지만 이런 경우엔 20년 짠 밥이 아무 소용없다. 아무 말 못 하고 머뭇거리는데 갑자기 어머니는 울먹이기 시작하셨다.
"아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엄마 맘 아프지 않게 꾸미고 살아. 알았지?"
들릴 듯 말듯한 소리에 호통을 친 이유를 알게 되자 서서히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피어났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 보고 대화할 때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 눈에 담긴 상대의 모습이 내 기분을 좋게 할 때가 있다. 젊고 이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일단 내 눈이 즐겁고, 내 모습이 이 사람과 비슷할 거라는 착각 때문이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이내 현실을 자각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10년 만에 시동생이 결혼할 아가씨(현 동서)를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정말 좋았다. 시동생과 같은 회사에 신입으로 들어온 동서는 시동생보다 10살 가까이 어리고, 모델처럼 키도 컸다. 너무도 완벽한 화장과 늘씬한 몸매가 돋보이는 원피스를 차려입은 동서를 본 순간 계속 말을 걸고 싶었고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그제야 아들만 둘을 키우신 어머니가 콩알만 한 나도 여자애라고 신기해하며 매일 전화를 하고 주말마다 밥을 해주겠다고 불러들이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삼수생 아들과 곧 고3이 될 딸 때문에 애 끓이지 말고 너무 신경 쓰지도 말라는 당부를 전하시며 통화는 끝이 났다. 늘 나를 보며 이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던 어머니는 어지럼증으로 사리분별이 잘 안 되시는 와중에도 어느새 늙어버린 내 모습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실은 요즘 내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단지 귀찮아서다.
거울을 보니 귀신같은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영락없는 푸짐한 50대 아줌마가 서 있다. 한참을 웃다가 슬퍼졌다. 그래도 당장은 자르고 싶지 않았다. 자른다고 갑자기 선녀가 될 것도 아닌데...
2주 전, 퇴근한 남편이 안방으로 나를 가만히 불렀다. 낮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계속 어지럼증이 심해지셔서 뇌 MRI를 찍었더니 종양이 있다는 검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주치의는 크기가 아주 작아서 당장 수술은 안 해도 된다고 했단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아무렇지 않다고 당신은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다고 평소와 다르게 명랑하신 목소리에 나는 불안감이 더 커졌다.
다른 병원에서도 한번 더 의견을 들어보자고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한 주가 꼬박 걸렸다. 마침내 삼성서울병원에 예약한 날이 이틀 전으로 다가오자 나는 미용실에 갔다. 브라선까지 길었던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드라이를 하니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년 가까이 늘 단발이었다가 최근 2년 새 자를 타이밍을 놓쳐 길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예약날 아침,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머리를 드라이했다. 눈밑에 까뭇한 기미를 컨실러로 가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화장에 공을 들였다. 오랜만에 코르셋을 꺼내 입고 남색 원피스와 뾰족구두를 신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내손을 꼭 잡고 진료실에 들어가실 때까지 놓지 않으셨다. 아버님과 어머니, 남편과 나는 진료실 앞 대기실에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간간이 웃음이 흘렀지만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웃지 못했다.
어머니를 담당한 의사 선생님은 수술이나 약물치료가 필요 없는 양성종양이라고 했다. 크기도 너무 작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대기실로 돌아와 앉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편의 여자친구로 처음 인사드렸던 청명한 그 해, 나는 25살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한 52세셨다. 서로를 알아가는데 고부갈등은 당연했고 미운 정 고운 정은 남편보다 더 진해졌다.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한 나를 보고 다시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자식은 부모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본다. 어머니를 부모로 모시고 살아온 시간 동안 별로 내세울 것 없던 내가 당당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