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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려는데 미국에 있는 여동생에게서 보이스톡이 왔다. 첫 조카의 길고 긴 입시가 끝났다는 걸 축하하기 위해 동생은 새벽부터 분주히 조카들의 도시락을 싸서 차례로 학교에 데려다준 후에야 차 한잔을 눈앞에 두고 내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애정하는 프로그램이라도 동생의 길고 긴 여정을 알고 있는 나는 핸드폰을 들고 비어있는 방을 찾아 자세를 잡았다.
올해로 21살이 된 큰 애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동생은 제부와 결혼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동생은 모 금융그룹에 입사한 지 6개월 차에 접어든 신입사원이었다. 회사 입장과 앞으로의 경력을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도 동생은 제부의 유학 뒷바라지를 자처했다. 후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동생은 무덤덤한 말투로 '그때가 아니면 평생 새로운 세상을 보러 갈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IMF 외환위기는 우리 집도 예외 없이 들이닥쳤다. 줄줄이 20대로 들어 선 해맑은 우리 삼 남매는 아빠의 사업실패와 함께 '돈이 없다'는 현실을 곧바로 실감하지 못했다. 강남 한복판에서 돈 걱정 없이 공부하는 게 디폴트였던 우리는 하루아침에 낯선 동네 온종일 불을 켜야 사방이 보이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구해야 했겠지만 우리는 부모님 말씀을 정말 잘 듣는 아이들이었다. 당시 나와 남동생은 대학원과 대학교에 막 입학한 상태였고 여동생은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은 하던 공부는 마저 해야 한다며 삼 남매 모두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게 하루하루를 버텨내셨다. 나는 휴학과 아르바이트, 복학을 거듭했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학과 조교, 장학금을 받아 학비를 해결했다. 그런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서서히 불편한 현실을 체감해 갔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도망치듯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여동생보다 2살 어린 남동생도 부모님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군대를 가버렸으니 홀로 남은 여동생은 아마도 입사가 결정된 후 굉장한 안도감과 동시에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야 집안에 보탬이 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마음보다 더 이상 돈을 버는 일 외에 다른 삶은 꿈꾸지 못할 거라는 무력감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제부는 처음 여동생을 소개받던 날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 줄 알았다'는 말로 지난한 일상을 살던 우리 가족에게 큰 웃음을 안겨 주었다. 제부는 여동생과 만나기 전부터 미국유학을 준비했다. MIT를 비롯한 대여섯 곳의 대학에 석박사 통합과정을 지원했고 모두 합격 통보를 받자 여동생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오로지 장학금만으로 의식주를 해결해야 했던 동생네는 미국에 처음 도착한 날 배정된 MIT기숙사에서 캠핑 온 것처럼 맨바닥에 홑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제부는 아이비리그 중 한 대학의 교수가 되고 펜실베이니아의 학군 좋은 곳에 정원이 있는 꽤 넓은 집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건 제부의 눈부신 연구성과도 있지만 때때마다 동생이 하고 싶은 걸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중 제일 아쉬웠을 일은 독학으로 미국 보험계리사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위해 취업한 직장을 또 일 년도 안되어 포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일 년의 반이상을 학회 강연과 비즈니스를 위해 전 세계를 누비는 제부를 대신해 홀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으니까
여동생과 모처럼 긴 통화를 했다. 첫 조카의 대학합격을 축하하는 인사를 시작으로 서로의 일상과 부모님 근황, 한국과 미국의 대학입시 풍경을 주고받았다. 여동생의 첫째는 나의 둘째보다 한 살 어리지만 미국 학년으로 조카 역시 올해 대학입시를 치르는 나이가 되었다. 아빠가 대학교수니 조카도 같은 대학에 가면 학비에서 어느 정도 베네핏을 받을 수 있겠거니 하고 나대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동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국의 입시도 우리나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만만치 않았다.
미국의 대학입시는 SAT성적보다 다양한 스펙을 갖출수록 합격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스펙은 다양할 뿐 아니라 성적 또한 우수함을 증명해야 해서 미국의 부모들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마음과 재력을 온전히 쏟아붓는 게 현실이라 했다. 그럼에도 공부를 잘한다고 스펙이 출중하다고 합격되는 것도 아니란다. 우선은 시민권을 가진 똑똑한 아시아인들에게는 쿼터제가 있어 다른 인종보다 훨씬 더 좁은 문을 아시아인들끼리 경쟁해서 통과해야 한다. 그 조건을 충분히 갖추더라도 대학이 원치 않는다면 합격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학이 그 이유를 알려주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당연하게 주장하는 공정성은 기대할 수 없단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상황이 오히려 아이들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아 부모나 아이들 모두 한국보다는 조금 마음이 편할 수도 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했다. 조카도 취미를 넘어서는 운동을 오랫동안 해왔고 전공과 관련된 스펙을 쌓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그 정도는 동생이 사는 동네에서는 일반적인 수준이라 결국 치열한 아시아인 쿼터제 안에서 SAT와 추천서만으로 승부를 내야 하는 현실에 동생은 이미 담담해져 있었다.
5년 전 지인의 아들이 브라운 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지인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대학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알려준 적이 있었다. SAT학원은 하루 20여만 원을 웃돌았고 보다 좋은 SAT 성적을 받기 위해 때때마다 싱가포르, 필리핀 등에서 시험을 치고 왔다. 또 펜싱을 스펙으로 선택했는데 각종 국제대회 승점이 있어야 해서 열 번 이상 국제대회를 치르러 해외로 나갔다. 한 번의 국제대회를 치르기 위해 체류비와 참가비, 코치비 등으로 약 700만 원 이상을 썼다고 묻지도 않은 세세한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지인은 돈이 많다는 걸 은연중에 과시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별나라 이야기쯤으로 이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두 아이 모두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쯤 공부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다. 지인에게는 택도 없는 교육비지만 그때까지 매달 들어가는 교육비는 남편 수입의 반절 이상을 차지했다. 한 달 벌어 겨우 한 달 살아가는데 노후준비는커녕 두어 달 앞의 미래조차 상상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다시 내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아이들의 공부 의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동생에게 이제 좀 살만해졌다며 씁쓸하게 웃으니 동생도 따라 웃었다.
대학을 간다 해도 미국은 등록금도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장학금으로 해결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동생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로컬의 경우 성적 우수 장학금이 없다고 한다. 수입에 비례한 장학금 혜택이 있지만 동생네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동생은 조카에게 거주자 혜택이 있는 주립대학을 추천하며 굳이 주를 넘나드는 먼 곳의 대학에 지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조심스레 건네곤 한단다. 등록금에 기숙사비, 생활비까지 어느 정도는 보조해야 하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겠지만 무엇보다 시간, 비용 등의 다양한 사정으로 보고 싶어도 방학 때 한두 번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주변 지인들의 말을 듣다 보니 동생은 벌써부터 마음이 아린다고 했다.
그 아픔을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동생이 미국에서 두 조카를 낳을 때쯤 엄마에게 산후조리를 부탁했었다. 부정맥이 있는 엄마는 장시간의 비행을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보다 비행 경비를 마련하는데 더 큰 마음고생을 하셨다. 그때 막 포닥을 시작한 제부에게 비행기표를 기대할 수 없었고 나도 먹고사는데 급급한 시절이라 엄마가 얼마나 마음을 동동거렸을지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제부가 비행기표를 보내주어 부모님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2번의 산후조리와 갑작스러운 동생의 낙상사고에 경황없이 미국을 다녀온 게 전부다. 나 또한 10여 년 전 일 년 이상 생활비의 일부를 모아 초등학생인 아이들과 3개월 동안 동생네에 놀러 갈 수 있는 경비를 마련했었다. 지금은 제부의 학회 참석이나 안식년 등의 일정이 조카들의 상황과 맞물리면 한 번씩 동생네가 들어온다. 그래도 보고 싶을 때 보러 가고 보러 올 수 있는 여유는 여전히 나와 부모님에게는 쉽게 선택할 수 없는 호사의 영역이다. 경제적인 이유보다 건강상의 이유가 더 커진 것만 다를 뿐. IMF이후 시간을 거슬러보니 미국에 사는 동생이나 한국에 사는 나나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사라져야 살아낼 수 있는 삶이 디폴트가 된 것이다.
동생과 이야기하는 사이 옛날 생각이 나 자꾸만 울컥했다. 우리는 태어나서 각자의 삶으로 갈라지기 전까지 늘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낮에는 서로 다른 성격을 잘 아는 탓에 부딪히지 않으려 피해 다니다가도 밤이 되면 동생은 내 목에 손을 얹어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무서움이 많던 나도 동생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안심을 하고 잠이 들었다. 그런 우리가 엄마가 되고 아이들의 대학입시를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잠들기 전 우리는 그날 있었던 일과 내일은 뭘 입고 나갈지 등의 사소한 대화를 나누고 아주 가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했다. 어릴 적 장면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나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꿈 이야기를 했다. 최근에 맡은 일이 학교를 짓고 싶다는 내 꿈을 실현하는데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며 늘 꿈을 품고 살면 언젠가 이루어질 것만 같다고 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은 다른 이에게 넘어갔고 나는 한동안 실망했다.) 너의 꿈은 뭐였냐고 물으니 동생은 조금 망설이다 이내 명랑한 목소리로 가물가물하단다.
요즘 동생은 매일 집과 정원을 가꾸고 여전히 조카들의 도시락을 싼다. 나는 매일 회사일에 치여 쿠팡잇츠로 가족들의 식사를 해결한다. 경영과 공간디자인이라는 각자의 전공과 능력, 일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면 우린 서로의 인생이 뒤바뀐 건 아닐까 생각하다 헛헛해졌다. 동생을 못 본 지 벌써 5년이 넘어간다. 코로나가 그 시간을 더 늘려 놓았다. 동생에게 '언니 참 많이 늙었다. 나중에 보고 놀라지 마!' 했더니 동생은 지가 더 늙었다고 한다. 이제 염색을 하지 않으면 온통 머리가 새하얗다고… 유전도 없는데 미국물이 안 맞았는지 동생은 미국에 도착한 그 해부터 머리가 하얘지기 시작했다. 나보다 3살이나 어린 동생이 늙어가고 있다는 말에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터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