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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Aug 22. 2022

스위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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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생리통이 유난히 심했던 10월의 어느 날 아침, 내 몸 상태를 눈치챈 부모님은 차마 말리지 못하시고 '도저히 안 되겠거든 그냥 돌아와' 하며 보내주셨다. 첫 직장을 그만두었을 때 해보고 싶은 일이 바로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이었다. 사랑을 놓치고 타지로 떠난 여행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스토리가 당시 유행이었는데 그런 스토리를 내 인생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전공과 무관한 첫 직장에서 도망치듯 퇴사했던 터라 앞으로의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 선본 이와의 결혼이 생각보다 빨리 추진되는 듯해 어디든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아무튼 그때는 떠나고 싶었고 떠나야만 했다. 언제나 현재를 미래에 유보하고 그 현재는 이전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홀로 떠나는 스위스 여행은 당시보다 그 이후 다시 꺼내는 기억이 더 생생하다.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일은 일처럼 진행했다. 편안한 휴식이나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한 여행이 아닌 '낯선 생을 마주하며 견디는 힘을 키우는 도전'이라는 나름 비장한 각오가 포함되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목적지를 정하는데만 여러 날을 보냈다. 영어가 주 언어가 아닌 나라(나를 위해서)를 중심으로 교통과 숙박 체계가 비교적 안전한 나라(부모님을 위해서)를 떠올리던 중 어릴 적 손 닳도록 애정 했던 만화책 먼 나라 이웃나라에서 만난 스위스를 선택했다. 그다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릿속에 스위스 지도를 새겨 놓고 최대한 한국인과 마주치지 않는 동선을 계획했다. 나는 철저히 외로워야 했으니까. 하하!


 

비 오는 어느 날 홍대 근처 여행 카페에서 쓸쓸히 걸어 나오는 나를 보았다. 화창한 어느 날은 스위스 대사관에서 대사와 인터뷰를 하러 온 남자를 따라가는 나를 보았다. 좁고 아늑한 대사관 로비에는 서넛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ㄱ자 소파와 그 옆으로 안내데스크가 있었다. 안내데스크를 뒤에 두고 소파에 앉은 나에게 들려온 말은 꿈결처럼 들렸다.


"first language는 프랑스어, second language는 영어, 그다음이 한국어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두세 살 위로 보이는 남자가 허리를 숙여 어정쩡한 모습으로 안내데스크에 있는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를 쫑긋 세워 그들의 문답을 엿들었다. 남자는 무역 관련 공부와 취업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다고 했다. 언어가 그저 삶을 살아가는 도구에 불과한 사람을 실제 모습으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가 대사관을 떠나기까지 하릴없이 스위스 홍보책자만 이리저리 돌려보며 기다렸다. 드디어 할 일을 마치고 나가는 그를 보고 서둘러 뒤따라 나섰다. 대사관 정문을 지나자 '아차!' 정신이 들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뒷모습이 흐릿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좋아 보이는 무언가를 나도 모르게 따라가는 내 지병이 도진 것이다.


*

싱가포르 항공 여객기였다. 유럽 어딘가에서 한번 갈아타고 취리히 공항에 내렸다. 밝고 세련된 분위기의 공항은 유리로 마감된 천장을 투과한 아침햇살을 내 까만 머리 위로 몽땅 쏟아내고 있었다. 출입국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길고 거대한 에스컬레이터는 다양한 목적으로 오가는 공항 이용객들의 동선을 보다 역동적으로 보이게 했다. 생기 가득한 수많은 백인들을 헤치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공중전화를 찾아 엄마와 통화를 했다. 장장 22시간의 비행은 나로서는 그저 흘러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에게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내가 챙겨 온 여행 준비물은 옷가지가 든 트렁크와 여권, 영한/한영사전, 세계여행 가이드북 스위스 편, 스위스 패스, 다이어리, 휴대용 사진기, 국제전화카드가 다였다. 출발하기 전 비행기표와 스위스 패스, 여행자보험으로 200만 원을 쓰고 여행기간 총 10일간 50만 원이 넘지 않도록 계획했다. 매일의 밥값은 만원 내외였으며, 숙박 역시 2~3만 원이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지 인포메이션센터를 통해 구하기로 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마을로 유명한 마이엔펠트를 시작으로 리히텐슈타인, 루체른, 베른, 인터라켄, 몽트뢰, 로잔을 경유하여 제네바에서 귀국하는 일정은 민속박물관, 미술관, 자연공원, 고성 관람으로 느슨하게 채워졌다. 특별히 큰돈이 드는 몇몇 관광지는 제외시켰는데 알프스 산꼭대기에서 하는 번지점프가 그중 하나였다.

기차를 타고 그곳의 자연을 손 닿을 만큼 가까이 느끼고 몇 시간을 걷다가 또 기차를 타는... 느리고 단조로운 여정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여행 3일 차 인터라켄 기차역에 내리니 가을비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익명의 여행객들 속에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 둘 걸음을 옮기는데 ‘안녕하세요'라는 말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졌다. 짙은 외로움을 한순간에 잊게 하는 모국어!

반가운 마음을 숨겨야 하기에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어떻게 한국 사람인 줄 알았냐고 물었을 때 우산남은 여행 중 같은 민족을 알아보는 법으로 '안녕하세요'를 추천한다고 했다. 알아들으면 대부분 쉽게 마음을 열고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해 준다나. 그는 유럽여행을 시작한 지 2주 차가 되어간다고 했고 번지점프를 하러 인터라켄에 왔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번지점프를 성공하면 로프를 얼마간 잘라 기념품으로 준다고 해서 꼭 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낯 가린다는 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음 본 나에게 여행 중 만난 다양한 한국사람들의 풍경과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끝에 그저께 프랑스 어딘가에서 만난 여행객들과 오늘 이곳 어느 숙소에서 만날 거라며 그는 상당히 들떠있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이 만난다는 숙소와 정반대 편에 있는 숙소를 잡을 예정이었다.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좋겠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라고 답했다. 어느덧 나타난 갈림길에 마주 서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혹시 저녁식사를 어디서 할 거냐고 물어보길래 여행책에서 추천한 한식집에 가 볼 예정이라 했다. 서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른 채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잘 가라고 인사를 하고 그는 우산을 쓰고 가라고 했다. 그리고 저녁때 그 식당 근처에 있을 테니 그때 우산을 돌려달라고 했다.

스위스 전통양식으로 꾸며진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비가 그친 후 쌀쌀해진 저녁의 온도를 감안하여 후드티를 챙겨 입고 설렘과 기대를 안고 식당을 찾아 나섰다. 맛도 세팅도 별로였던 식당에서 혼밥을 먹고 나오니 길 건너에 우산남이 보였다. 그는 여러 여행객들과 한창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행복해 보였다. 다시 만난 반가움에 들떠있던 여행객과 그는 저편에 나는 이편에 서서 우산을 건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는 술 마시러 갈 건데 함께 가자고 했다. 저편의 공기와 이편의 공기는 현저히 달랐고 나는 갈 수가 없었다. 한번 허물어지면 모든 결심들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멀어지는 그들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여행의 초심은 단 한 번의 충동도 허락하지 않았다. 혹시 한 번만 더 물어보았다면 따라갔었을지도... 정말이지 진심 따라가고 싶었다.


*

여행 7일 차 몽트뢰 역에 내렸다. 여행 중 가장 깨끗한 유스호스텔이 있는 도시이다. 이제는 영어가 한국말보다 먼저 나왔고 길을 물어보는 일이 즐거울 정도였다. 조금만 더 이곳에 머무른다면 영어 정도는... 하는 맘이 절로 들어 자신감이 막 올라갈 참이었다.

또 비가 내렸다. 참으로 깨끗하고 우아하고 시원한 거리 풍경에 한참 마음을 빼앗기다 숙소를 찾는데 또 한참을 헤매었다. 지나가는 고운 옷차림의 할머니께 길을 여쭈었다. 대부분의 길은 가다가 오른쪽 또는 왼쪽이었는데 내가 찾는 그곳은 거리 중간에 뜬금없이 나타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층을 내려서 나오는 길 끝 어딘가에 있었다. 그 수많은 문장을 알아들을 리 없는 나를 위해 할머니는 그곳까지 몸소 동행해 주셨다. 할머니는 본인의 손녀가 나와 닮았다고 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20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호기심과 두려움을 말씀하신 듯싶다.

이층 침대가 있는 4인실에서 짐을 정리한 후 공용 화장실에서 씻고 들어오니 단발의 금발머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나를 보자 싱긋 웃더니 대뜸 콜라 마시러 나가자고 했다.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들고 따라나섰다. 이제 막 20살이 된 이 오스트리아 아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째 홀로 유럽과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이름을 주고받긴 했지만 기억나지 않고 내가 왜 영어를 못하는지에 대해 한참 동안 사전을 펴놓고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을 설명했고 생활영어가 아닌 문법 중심의 영어시험이 영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녀는 중고등학교 6년의 영어교육이 이렇게 헛됨을 의아해했다. 나만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

홀로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더 짙은 외로움을 선물하고 정말 맛없는 스파게티를 군말 없이 먹게 했다.

너무 철저하게 계획한 여행이라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도 뜻밖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행 직전 전공과 관련한 전문잡지 속에서 보았던 주택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마당으로 걸어가 집안을 엿보는 과감한 나를 만났다. 피카소가 소묘를 그렇게 잘했다는 소문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했을 때 감동받은 나도 만났다. 기차역 매점에서 산 치즈만 든 딱딱한 빵을 질겅거리며 달리는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나를 마음속에 담았다.


여행이 끝나고 선을 본 이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음을 부모님께 알렸다. 두 손이 꽁꽁 얼어붙을 만큼 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신사동 언덕길에 있는 실기학원에 등록한 지 한 달만에 대학원에 합격했다. 아마 여행을 가지 않았어도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여행 전의 내가 아니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두렵지 않아 함께 하는 일들이 더 의미 있음을 알았다. 세상 건너편에서 만난 타인들의 삶의 방식에서 내가 꿈꾸던 상상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이해받았다.


지금은 혹은 누군가에게는 ‘나 홀로 여행'이 그리 큰 의미가 아닐 수 있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20여 년 전 나의 스위스 여행은 결과적으로 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와 선을 본 이가 부모님의 반대로 헤어졌던 연인과 결혼할 수 있었고 10여 년 간의 경력단절 여성에게 다시 일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행하는 동안 미처 즐기지 못했던 여행의 과정과 풍광과 감동은 그 이후 한 번씩 꺼내보는 추억을 선사하며 매번 더 풍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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