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모습은 그야말로 안경 쓴 '양배추 인형'이었다. 통통한 볼살로 완성한 밥통형 얼굴에 꽤나 두꺼운 안경은 앙칼진 눈매를 가리는 대신 눈을 더 작게 만들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는 양갈래로 땋아 리본으로 묶고 여기에 블라우스와 치마 또는 허리를 묶는 원피스로 두리뭉실한 몸을 감쌌다. 스승의 날이나 개학식 같은 특별한 날은 주름치마와 재킷이 세트로 된 정장과 하얀 스타킹을 꼭 챙겨 입었다.
이 모든 연출은 엄마의 작품이다. 세 살 터울의 두 딸을 키우는 엄마는 제한된 예산을 고려한 나름의 전략이 필요했다. 게다가 둘째의 설움을 잘 아는 엄마는 둘째 딸이 물려받은 옷을 헌 옷이라 불평할 수 없도록 옷을 살 때마다 꼼꼼히 따졌다. 한번 산 옷은 수십 번을 세탁해도 형태가 망가지지 않고 평일과 특별한 날 동시에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엄마는 '티셔츠와 바지'보다는 '블라우스와 치마 또는 원피스' 조합이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무엇보다 대구에서 서울로 그것도 대치동 한가운데에 막 전학 온 딸들이 옷차림부터 서울 아이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엄마는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은 '예의'라 하셨다. 정갈하게 단장한 내 모습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거라 믿으셨다. 그러나 또래와 다른 옷차림은 늦된 성향과 맞물려 그들의 미움을 사는 원인 되었음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새 친구들 무리에 빠져 있거나 그들의 편의에 따라 무리에 합류되던 일이 잦았던 그때는 이유도 모른 채 아파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성향 덕에 또래의 악랄함을 당시에는 정확히 느끼지 못하고 그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엄마의 연출은 중학교 때도 이어졌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까만 블라우스와 하얀색 A라인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 내 짝은 반야심경을 외우며 이야기를 참 재미지게 하는 남자아이였다. 종종 내 몸을 훑어보며 지적질을 하거나 책상 한가운데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면 다 자기 거라는 룰을 저 혼자 정하고 내 물건을 뺏어갔다. 아둔한 나를 답답해하던 짝은 다른 친구들과 자리를 바꿔 좋아하는 여자 친구 옆에서 몇 시간씩 떠들다 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짝이 싫지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주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나는 불교의 윤회설에 한참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도 놀림에 여념 없는 짝에 맞서 씩씩거리며 티키타카를 하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왈칵 쏟아지는 이상한 느낌이 '하얀색' 치마로 번져가는 동안 수업은 시작되어 버렸다. 두세 번의 쉬는 시간이 돌아와도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은 하얗고 얼굴은 빨개지거나 더 빨개졌다. 뜬금없이 짝은 입고 있던 셔츠를 던져 주고 사라졌다. 곧이어 몇몇 친구들이 찾아와 나를 둘러싼 채 셔츠를 내 허리에 묶고 양호실로 데려갔다. 엄마가 부랴부랴 챙겨 온 옷으로 갈아입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짝은 내 몸과 관련된 짓궂은 장난을 하지 않았다. 하얀 치마는 사춘기의 미숙함과 첫사랑을 각인시키고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2학년이 되자 엄마는 새 학기 기념으로 노란색 원피스를 사주셨다. 그 옷을 처음 입은 날 인기 많은 여자 반장 무리와 함께 학교 뒷마당에 있는 화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시던 깡마른 담임선생님은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효인아! 네가 입은 옷은 반장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하하!”
선생님이 웃으시자 곁에 있던 친구들도 따라 웃었다. 통통한 허리에 둘러진 ‘이쯤이 허리일 거야'라고 야무지게 표시한 나비모양의 허리끈 때문이었다. 노란색 원피스는 누가 봐도 참 예뻤다. 그런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그 순간 정확히 깨달았다. 엄마의 연출이 나를 빛나게 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그러한 옷은 날씬한 허리, 인기 있는 외모, 상위권의 성적이 결합되었을 때 보는 사람이 한결 편하게 느낀다는 것도 함께 말이다.
엄마가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앉아만 있던 나의 몸은 더더욱 살이 올랐지만 지난 3년 동안 참았던 엄마의 연출 욕망은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다시 타올랐다. 내 손을 잡고 당차게 영캐주얼 브랜드가 입점한 백화점 3층으로 향했다. 엄마의 눈을 사로잡았던 한 브랜드 매장에서 직원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매장에는 손님 사이즈가 없어요... 저희는 66까지만 준비되어 있어요"
그녀는 정말 안타까워했다. 그 안타까움 이면의 비웃음을 우리 모녀가 모를 리 없다. 상기된 표정의 우리는 이후 서너 군데 매장에서도 사이즈 없음을 확인하자 백화점 전층을 샅샅이 뒤질 각오로 하나씩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마침내 한 매장에서 허리에 다트선이 있는 까만 블라우스와 흑백의 체크무늬 미니 플레어스커트가 세트인 졸업식 정장을 살 수 있었다. 그 브랜드는 결혼 예복을 콘셉트로 제작 판매하는 곳이라 사이즈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얼마를 지불하든 내 몸에 맞는 옷을 찾는 일이 우선순위가 된다. 1년 후 15kg 이상을 감량한 나는 나를 돌려보냈던 매장들을 찾아갔다. 보란 듯이 수십 번 옷을 갈아입다 맘에 드는 옷이 없다며 유유히 떠나는 소심한 복수를 했다.
대학생이 되면 원 없이 연애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여대를 다니던 내게 자만추는 그림의 떡이었다. 개연성 있는 연애로 이르는 유일한 길은 단체미팅이나 소개팅뿐이다. 거기서도 호감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살은 빠져야 했다. 대놓고 못생겼다, 촌스럽다, 뚱뚱하다고 말하는 타인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나는 뛰고 굶으며 살을 뺐다. 그 시절 내 세상은 온통 살과 자존감이 반비례하는 이상한 세계였다. 한 번도 그게 이상하다고 자각조차 못한 게 더 이상할 정도였지만 세상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는데 익숙한 나는 숙련된 정비공처럼 몸을 만들어갔다. 어느새 몸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나 신발끈을 묶으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옆구리 라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자 매일 어떤 옷을 입어야 날씬해 보일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신기하게도 옷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그다지 들지 않았다. 시작은 타인의 눈높이였는데 결과는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버린 것이다. 결국 허리를 묶는 원피스도 10대와 20대의 서로 다른 이유로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취향은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때로는 좋아서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취향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 예의가 없는 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옷을 선택하다 보니 어느덧 내 취향은 나의 성격과 닮아 있었다. 나도 편하고 보는 사람도 편한 무색무취의 스타일로. 무채색 계열의 맨투맨티 또는 후드티는 내가 선호하는 일명 '놈코어 룩'이다. 세월의 흔적만큼 다시 살은 차곡차곡 토르소 부위에 저축되었다. 이런 체형을 완벽하게 가리는, 지금은 시들해진 놈코어 룩이 임신과 육아를 거치면서 다져진 뻔뻔함과 더 이상 늙지 않으리라는 다짐으로 발현될거라 믿으며... 옷장에는 이미 비슷한 색과 모양의 맨투맨티나 후드티가 수두룩 하지만 미묘한 디테일의 차이로 때때마다 돈과 쇼핑의 수고로움, 남편의 핀잔을 감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