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롱지다 Oct 10. 2022

남편의 여사친들에게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별일 없는 일상에 던져진 초대장은 퇴사 후 처음으로 정장을 꺼내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고 치르는 결혼식에 희진은 초등 동창회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친구들을 초대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공부로 외모로 이름깨나 날렸던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인사를 건네 왔다. 내 눈에 비친 그들은 모든 일이 당연하고 쉬워 보였다. 단 한 번도 내 얼굴을 제대로 본 적도 내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던 아이들이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을 뺀 채 이름을 불러대며 술을 권하고 어제 본 사이처럼 일상을 이야기했다. 당황하고 신기한 시간에 익숙해질 때쯤 나는 깜박거리는 불빛들이 가득 찬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 무릎에는 낯선 남자아이가 머리를 대고 누운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노래방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던 아이였는데...


밤 12시가 되자 급히 가방을 챙겨 뛰쳐나왔다. 내 무릎에 누워있던 그 아이가 뒤따라 나왔다. 유흥의 거리와 아파트 단지 사이에 놓인 횡단보도 앞에 서자 그 애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음 날 학교 가는 지하철에 앉아 그 아이를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근데도 자꾸 웃음이 났다.


며칠 후 연청색의 폴로셔츠와 흰 반바지 아래로 털이 잔뜩 난 다리를 드러낸 그 아이는 나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뒤로 당겨 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를 만큼 어색하고 관심 없는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정작 들어야 하고 하고픈 이야기가 따로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한 한강공원의 강바람 사이로 '사귀자'는 말이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좋게 봐주어서 고맙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으면 다가오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이러면 이제 막 제대한 남자애는 당연히 멈출 줄 알았다.


연애는 그 아이의 열정으로 시작되었고 연애를 유지하는 여정은 나의 몫이 되었다. 연인이 된 후 남자 친구에게 오래된 세 명의 여자 사람 친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혼식 초대의 주인공이자 카리스마 작렬 희진, 어린 시절 온 동네 남자아이들의 첫사랑 채영, 그리고 내 남자 친구를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민서가 바로 그들이다. 우리 모두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다. 어린 시절 이들은 각각 잘난 척, 이쁜 척, 싸가지를 대표할 수 있는 부류였고 특히 '이쁜 척'과 '싸가지'는 서로를 굉장히 싫어하는 사이로 유명했다. (당시 소문이 그랬다. 편의상 붙인 별칭으로 희진을 빼고 다른 아이들과 친분이 없는 관계로 나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 다시 말하면, 남친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 결코 나타나지 않을 그런 부류였다는 말이다. 나와 남친이 사귄다는 소문이 동창들 사이에 돌자 그들은 동시에 각자의 상황과 방식으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1

희진은 초등학교 때부터 남녀를 가리지 않는 카리스마로 또래를 제압하며 선생님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친구였다. 이런 친구들은 대개 절친이 없다. 비슷한 성적의 아이들은 희진을 경쟁자로 여겼다. 학생회 일을 도모할 때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 협력하고 뒤에선 욕을 했다. 그런 희진이 유일하게 속내를 내보인 친구가 '나'라고 그때의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희진이 예고로 진학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졌다. 그리다 대학 졸업 후 1년간의 회사생활을 접은 지 정확히 3일째 되던 날, 새우깡을 사러 간 동네 마트에서 나는 희진과 재회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도 8년간 마주치지 않았던 게 이상할 정도였지만 우리는 이틀 못 본 사이처럼 손을 맞잡고 근황을 이야기 했다. 그리곤 얼결에 청첩장까지 받았다. 희진은 화려한 결혼식 후 독일로 유학을 갔다가 1년 후 이혼을 하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반대가 결혼 후에도 이어졌던 모양이다. 희진은 이혼의 아픔을 종종 내 남친과 공유했다. 본인의 집 바로 앞에 살고 있는 나 대신 40분 거리의 분당에 살고 있는 내 남친을 굳이 불러내서 밤새도록 그의 차 안에서 울곤 했다. 평소에는 철없는 남동생을 대하듯 야단치고 짜증 낼 땐 언제고 이럴 땐 남사친의 절대적 위로를 받으며 기대고 싶어 하는 의도를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2

대학시절부터 압구정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채영은 작고 귀여운 외모에 불필요한 애교까지 장착했다. 귀여움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어린 시절 남자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채영은 내 남친과 도를 넘는 장난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사이였다. 채영은 중학교 때부터 핸섬한 전교회장의 전적인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었다. 남친이 친구들에게 나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채영은 겨우 두 달 빠른 전교회장에게 '오빠 오빠'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소한 액세서리까지 명품으로 휘두르고 새하얀 얼굴에 도톰하고 새빨간 입술로 내 남친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 야! 니 스타일 아니잖아!


장난이라고 한다. 그럼 이런 상황도 장난이었을까?

훗날 나의 사랑스러운 둘째가 태어나고 한 달 후 굳이 밥을 해주겠다며 쳐들어온 채영은 아기를 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 아기 이름이 뭐야?

- 지안이! 태명인데 작명가가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고 해서...

- 혹시 알고 있었어? 도현이 첫사랑 이름이 '지안'인 거?


생각해 보니 남편은 아기가 뱃속에 자리 잡던 날 '지안'이란 이름이 참 이쁘더라는 말을 했었다. 그때부터 10달 동안 태명으로 아껴가며 불렀던 이름이었다.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한참을 웃던 그는 '너도 알잖아! 장난인 걸. 또 속았네. 하하!'

이것들이 진짜... 진정 산후 우울의 끝을 봐야 정신 차리려나!


#3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짝사랑이니까. 청담동 모 카페에서 다리를 꼬고 당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웨지힐을 신은 발을 까닥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첫인상으로 각인된 민서는 남친의 어머니(현 시어머니)와도 돈독한 사이였다. 민서는 남친과 같은 대학연합동아리에 들어가 친목을 핑계로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만나고 있었다. 간혹 짝사랑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친한 친구를 짝사랑에게 소개하고 주변에 머물며 훈수를 둔다. 남친의 전 여자 친구도 민서의 친구였다. 한창 논문 준비로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어 남친을 만나러 간 날들 중 민서와 함께 앉아있는 날이 서너 번 반복되자 나는 결심했다. 있지도 않은 남사친과 영화를 보고 있다고 문자를 보낸 후에야 남친은 더 이상 민서와 함께 만나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결혼 후 중학교 동창회에서 민서를 만났다.

'결혼생활은 괜찮아?' 하고 묻는 말에 나는 '너무 좋아!'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민서는 뒤돌아서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그래서 네가 살이 많~이 쪘구나!"

이겼는데 진 것 같은 기분이란 바로 이런 거 맞지!    




올해는 결혼 22주년이 되는 해이다.

남편은 연애할 때보다 결혼 후에 더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은 관계를 유지하기 버거운 날들도 있었겠지만 남편이 한번 웃어 주면 다른 세상이 된다. 누군가 그를 사랑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같이 살기에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 추천도 할 수 있다. 단 그의 소소한 취향들에 눈 감을 수 있는 인내심은 옵션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동창과 결혼한 우리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와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났기에 설렘과 기대로 가득한 시간들을 함께 보내고 서로 더 사랑한다며 삐지고 화내는 시간들 역시 적지 않았다.(아니 아주 많았다!) 사랑을 우정으로 바꾸는데 20년이란 세월은 큰 역할을 한다. 이제야 내 생애 처음으로 남사친이 생겼다.   

넉넉해진 마음은 문득 생각나는 옛일들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볼 기회를 주곤 한다. 그때는 여사친들의 무례한 태도에 잔뜩 약이 올랐지만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세 부류의 친구들에게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심한 장난을 쳐도 화내지 않고, 맘 놓고 비밀 이야기를 해도 믿을 수 있고, 때때로 남자 친구를 대신할 남자 사람 친구인 그와 긴 시간 우정을 유지해 온 그들이 실은 '부러워서 불편했다'는 감정이 보다 정확한 기술임을 깨달았다.


간간히 그들의 근황을 접한다.

희진은 의사와 재혼한 후 아주 똑똑한 아들을 키우고 있다. 친정에서 세워준 병원을 자상한 카리스마로 운영한다. 점심시간에는 식당 한가운데 세팅된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환자들의 신청곡을 들려준다고 한다. 아마도 환자들은 희진이 S대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임을 모를 것이다.

채영은 결국 전교회장과 결혼했다. 자산가인 집안 내력 덕분에 시가의 재산까지 관리하는 채영은 언젠가 나에게 '너처럼 아이만 키우며 살고 싶어!'라며 힘들어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불필요해 보이던 애교는 훌륭한 사업수완으로 대치되었고 여전히 재산은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시스템에 서툰 나의 실수로 '페친'이 되어버린 민서는 유명 디자인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남편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본인과 똑 닮은 딸과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는 사진들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볼 수 있었다. 분명한 건 민서는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걸 나에게 감사해도 된다. 적어도 지금 저쪽 방 한 구석에서 조그만 핸드폰을 두 손에 꼭 쥐고 전투력을 상승시키는 사람을 견디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조용히 '좋아요'를 꾹 누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취향의 탄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