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키색 야상점퍼를 어깨에 걸치고 까만 야구모자와 마스크로 착 달라붙은 머리와 밋밋한 맨얼굴을 가린 채 급하게 차를 몰았다. 수학학원이 있는 옆동네 상가에 주차를 하고 아이를 학원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이는 수업시간 동안 엄마가 같은 건물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니 엄마인 나는 일주일에 3번 3시간을 꼬박 그 언저리에서 기다린다. 보통은 상가 지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카페에서 일을 하며 보내지만 오늘은 추레한 내 모습에 질려 네일숍을 기웃거렸다. 코로나로 야외활동도 사회활동도 금지당한 터라 온통 나의 세상은 색을 잃어버렸다. 이대로는 도통 즐거워지지 않아 한동안 자제했던 네일로 마음이 끌린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상가 지하에는 서너 개의 네일숍이 다양한 프로모션을 유리창에 내걸고 가격 경쟁 중이었다. 그중 제일 저렴한 곳에 전화로 예약하자 곧바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퇴근시간에 임박해서인지 코로나의 여파인지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조명의 개수는 충분했음에도 조도가 낮아 언뜻 문을 닫은 줄 알았다. 네일 아티스트의 자리도 세 개나 있었는데 정작 한 사람이 자리를 옮겨가며 일을 하는 듯했다. 그렇지 뭐! 마음의 소리가 스치는 순간 내 손을 잡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이 네일숍 언니는 일반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핸드로션으로 간단한 손 마사지를 하고 아세톤으로 손톱을 닦고 큐티클에 오일을 떨어뜨린 후 큐티클 제거를 하는 순서를 거꾸로 재빠르게 진행했다. 아티스트의 역량이 최고로 빛나는 순간은 큐티클 제거에 있다. 제대로 작업한 큐티클은 몇 주가 지나도 가시래기가 일어나지 않아 손톱이 자라도 젤 네일의 수명이 오래간다. 여러 번 받다 보면 손을 잡는 순간 얼마나 숙련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언니는 내 양손을 번갈아 작업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얀 맨투맨 티 아래로 짐작할 수 있는 얇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내 손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울퉁불퉁 대충 하나로 묶은 머리와 웃을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 친절하고픈 의지가 없음에도 직업상 친절이 입에 밴 말투는 그 공간과 참 닮아 있었다. 고개 숙인 언니의 머리 너머로, 사람의 손을 타 빛바랜 색색의 매니큐어들이 나열된 벽 선반으로, 이미 불 꺼진 패디큐어실로 내 눈이 닿는 곳마다 지겨워!라는 말풍선이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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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7살 연하인데 직업은 공무원이고 2~3억짜리 집이 있구요. 3살 연상인 남자는 연봉이 7~8천 정도고 10~12억쯤 되는 집이 있어요. 그런데 홀어머니랑 같이 살아요. 손님은 누구와 결혼하시겠어요?"
느닷없이 질문을 하는 언니가 흥미로웠다. 아마도 까만 모자와 마스크로 감춘 내 모습이 익명의 완벽한 타인으로 보였나 보다.
"둘 중 맘에 더 드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선택하라며 제시한 상황 중 맘에 드는 것은 대부분 첫 번째일 가능성이 높고, 이런 경우 그냥 본인 이야기다. 역시나 언니는 연하가 더 맘에 들지만 연봉 7천의 10억짜리 집도 포기하기 어렵다고 했다. 솔직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언니가 이제는 귀여워지기까지 했다.
문제는 연상남의 홀어머니 란다.
갑자기 20년 전 막 결혼했을 때 풍경이 재생되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들사랑이 지극한 홀어머니 같은 분이 나는 두 분이나 계셨다. 사이가 나쁘지 않은 아버님과 어머님은 장가보낸 첫째 아들에 대한 기대, 안쓰러움, 그리움 등등의 감정들을 필터 없이 쏟아내셨다. 주말마다 만나는 아들인데도 손꼽아 기다리셨고 매일 밤의 통화는 아들의 아침과 저녁식사를 얼마나 어떻게 잘 차려주었는지 보고와 당부로 이어졌다.(그 당시 나도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직장인이었다.) 명절 연휴와 휴가가 시작되면 어머님은 몇 날 며칠 장만한 음식들을 연휴 내내 아들 입에 넣어주며 뿌듯해하시고, 아버님은 아들이 화장실 가는 시간조차 아쉬워하며 언제까지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기를 바라셨다. 그렇게 3박 4일 혹은 4박 5일 꼬박 시가에 있는 동안 나는 그저 애틋한 가족애를 지켜보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나로 인해 이산가족이 된 그들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 보였고, 그들 속으로 한 발짝 들이는 일은 웬만한 애교 없이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요는 홀어머니든 아니든 결혼으로 인해 부모와 아들의 유대가 더 끈끈해지는 현상은 어느 누구도 미리 알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근데 결혼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재산이 내 것이 되진 않아요."
"왜요? 결혼인데?"
처음으로 얼굴을 든 언니는 까만 모자와 마스크 사이의 내 눈을 정확히 쳐다보았다.
"상대의 경제력은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 때까지 유효할 수 있어도 내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부모님의 재력은 사는데 편할 수 있겠지만 자유를 누리긴 어려울걸요. 꼰대같은 말이지만 상대의 경제적 조건이 사랑하는 감정보다 우선하면 그가 가진 건 당연하고 그것이 사라지면 원망만 남아요!”
IMF가 시작될 즈음 남편을 만났다. 그 후 지속된 2년간의 연애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그가 취업에 성공하자 나는 결혼할 생각이 아니면 헤어지자고 했다. 그때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이든 뭐든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겨워 결혼이라도 해볼까 하는 네일숍 언니의 현재와 과거의 내가 맞닿은 느낌이 든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나 보다.
신혼살림은 그의 부모님이 노후를 위해 준비해 놓은 집에서 월세를 내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음에도 당당했지만 시부모님의 입장은 달랐던 것 같다. 아들을 위해 무조건 품어야 할 사람이 생겨버린 상황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나에 대한 배려와 경계, 우려가 종종 뒤죽박죽 삐져나왔으니 말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집의 가치는 상상 이상으로 올라 버렸다. 뒤늦게 결혼한 시동생 내외가 당연한 권리를 드러내자 부모님은 아들이 아닌 두 며느리를 향해 자식의 도리를 상기시키곤 한다. 결국 우리가 시가에 준하는 월세(물론 장기간의 월세가 집을 소유할 자격이 되지는 않는다)와 장자임을 내세워 더 이상의 마음을 품는다면 지금처럼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마저도 그의 사랑이 또는 나의 사랑이 유효할 때까지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네일숍 언니는 매일 마주하는 손님들 중 친해진 동네 젊은 엄마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친정 혹은 시부모의 경제력에 도움을 받는 그들의 생활이 부럽다고 했다. 글쎄... 내가 아는 지인들의 경우를 종합해볼 때, 세상의 공짜는 없다. 그 경제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소모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버티고 있는지 안다면 행복한 결혼의 조건은 쉽게 바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예외는 있다. 특별히 운이 좋거나, 자유가 뭔지 모르거나, 본인이 갖고 있는 것이 이미 많거나...
"그럼 경제적 조건을 보지 말아야 하네요?"
언니는 조금 짜증을 냈다.
"아니죠. 어느 정도 호감과 조건이 맞는 사람들 중에 사랑할 사람을 찾으면 되죠. 알 수 없는 미래보다 현재의 모습 때문에 사랑이 시작되니까. 근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 쉽지 않을 텐데요."
젤 네일을 바를 차례가 되자 언니는 여러 색을 내 손톱 위에 테스트를 해주었다. 다양한 색 조합을 번복하거나 고민할 시간이 길어지는데도 언니는 나의 선택을 진중히 기다렸다. 결국 맨 처음 고른 짙은 보라와 올리브 그린을 손톱마다 하나씩 걸러 퐁당퐁당 바르기로 했다. 칠하고 굽고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중에 언니는 내 손과 손톱 모양이 참 이쁘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게 말이다. 참 이뻤던 손이었는데 어느새 관절 마디가 두툼해져 결혼반지도 낄 수 없는 손이 되어 버렸다. 병뚜껑을 닫으면 다시는 열 수 없고 행주를 짜면 물기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져 버렸다.
"저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어요! 지금도 좀 있고.. 하하"
언니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부럽네요.. 선택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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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잡는 첫 느낌은 역시 배신하지 않았다. 적당히 제거한 큐티클 라인도 기분 좋은 색 선정과 깔끔한 바름새도 숨어있는 봄을 부른다. 상큼해진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언니의 얼굴을 보니 처음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계산을 하고 문을 나서기도 전에 등 뒤로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뒤돌아보니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 거울 앞에서 머리를 다시 묶고 있는 언니가 보였다. 밤이 되면 마법이 풀리는 백조 왕자처럼... 들뜬 모습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