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롱지다 Oct 08. 2023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

열일곱을 아로새긴 추리소설 _ 20231006144

유미가 가버렸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창밖엔 아카시아가 살랑인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는데 창가에 앉은 애가 무심코 창문을 열자 새하얀 꽃잎들이 휘날리다 살포시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달콤한 아카시아향이 회오리치며 코끝을 간지럽힌다. 주위를 둘러본다. 한 달이면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 절정을 지나 안정권에 들어선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도시락을 먹는데 나만 혼자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렇게 유미만 기다리다간 심심해 죽을 것 같아. 친구를 만들어야겠어!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다짐했다.


우리 반인 것 같은 애들이 까르르 웃으며 화장실로 몰려와 칸칸이 닫힌 문 앞에 줄을 섰다.


"어제 계란으로 머리 감았잖아! 어때? 윤기 나?" 깔깔깔

"야! 저리 가. 냄새 나!" 깔깔깔

"그래도 한번 제대로 맡아봐. 지난주에 맥주로 머리 감으면 노래진대서 해봤는데 머리가 상한 것 같아. 계란이 상한 머리 되돌리는데 특효라 해서 엄마한테 욕먹어 가며 했단 말이야. 혜진아! 네가 보기엔 어때?" 깔깔깔

"별로야!" 깔깔깔


세면대 거울을 통해 흘깃 쳐다보고 귀를 쫑긋 세웠다.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이마와 빰에 여드름이 퐁퐁 솟아난 애가 머리카락을 흔들며 같이 온 애들한테 물었다. 늘 초록색 점퍼만 입고 있어서 과학선생님이 '배추벌레'라 부르던 아이다. 앉아 있는 것만 봐서 몰랐는데 키가 170c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얼굴이 하얀 애가 배추벌레를 놀렸다. 그 아인 배추벌레보다 엄지손가락만큼 더 크고 체격도 운동선수처럼 건장했다. 혜진이라 불리는 아이는 배추벌레와 비슷한 키에 아주 시크한 분위기를 풍겼다. 길고 푸석한 생머리, 짧게 자른 앞머리, 빨간 안경테에 가려진 반듯한 이목구비, 무심히 입었을 맨투맨 티셔츠 너머로 늘씬한 몸매가 짐작되는 그 애는 얼핏 연예인 같은 느낌이 있다. 본인이 또래와 남다른 외모, 신체조건을 가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종일관 운동선수 같은 애와 배추벌레를 놀리는데 여념이 없었다. '계란으로 머리를 감는다고? 맥주로? 이상한 애들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교실로 돌아왔다.   




삼주 후 자리가 바뀌었다. 2주일마다 제비 뽑기로 자리를 정하는데 나는 네 번째 줄 창가 자리에 당첨되었다. 아카시아도 이제 끝물이다. 휘날리던 꽃잎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미와 단둘이 교정을 걷고, 수업을 듣고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던 1학년 때가 그리웠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찾아왔다. 좋은 소식은 유미와 또 같은 반이 되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유미가 학교 합창동아리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동아리 공연준비로 신학기 시작부터 유미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동아리실에서 선후배들과 점심을 먹고 연습을 해야 한단다. 음대를 목표로 하고 있기에 내가 외롭단 이유로 유미의 동아리 활동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수업 시간 후 쉬는 시간 10분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수업 중에 졸다가 종소리를 못 듣고 계속 잠이 들어버리면 유미와 붙어있을 기회를 날리고 만다. 필사적으로 나는 수업에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과목마다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이런 내게 수업태도가 좋다고 칭찬하셨다. 그러나 시험결과는 수업태도와 무관해서 선생님들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 빤히 쳐다보곤 하셨다. 나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목적이 다른 데 있는데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냐며 내심 당당해했다.


학년이 바뀌면 아이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십중팔구 친구 만들기 내지는 어느 무리에 들어갈지 탐색하며 벌이는 치열한 눈치싸움이다. 그것은 보통 점심시간과 하굣길에 이루어진다. 나는 그 시간에 다른 친구를 사귀면 동아리 활동을 마친 유미가 돌아왔을 때 섭섭해할 것 같아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일종의 '의리'라고 생각했다. 두 달쯤 지나 모두의 눈치싸움이 완료된 후엔 아무리 친구를 사귀겠다고 호기를 부려도 말이 그렇지 더는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하하 호호의 향연 속에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 따위나 보며 나 홀로 고독을 즐겨보려 했다. 아카시아는 참 아름다웠지만 열일곱 살에겐 친구가 더 아름답다.   



" What time is it now?"

앞자리에 앉아 있던 배추벌레가 포니테일을 팔랑이며 뒤를 돌아 다짜고짜 내 테비치로 필통을 가리켰다. 그 당시 애정하는 바른손 캐릭터인 테비치로는 내 문구용품의 8할을 장식했다. 테비치로 캐릭터가 프린팅 된 철제 필통엔 What time is it now? 문구가 쓰여있었는데 배추벌레는 그 문구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었던 것이다. 나는 영어로 지금 시간을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님 이 필통을 배추벌레한테 주어야 하는 건지 당황했다. 수초 간 망설이는데 배추벌레는 지 이름도 말하지 않고 오늘 아침에 뭘 먹고 어떻게 버스를 타고 누구를 만나 교실로 들어왔는지 아무렇지 않게, 마치 어제 같이 놀았던 사이처럼 별 것 아닌 등교 상황을 늘어놓았다. 우리 둘 중 하나는 분명 인지장애가 있는 거라 생각하며 '그랬구나' 연신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후에 나는 배추벌레에게 고백하곤 했다. 난 네가 미친년인 줄 알았어! 그러면 배추벌레는 웃으며 원래 우리가 친한 줄 알았다며 매번 똑같은 답을 해주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배추벌레는 다시 앞을 보고 턱을 괸 채 얼굴을 앞으로 내미는 특유의 자세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수업을 들으며 다음 쉬는 시간을 누구보다 더 열망하며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유미를 교실문까지 배웅하고 자리에 앉으니 배추벌레가 내 옆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란다. 그리고 뒤를 돌아 같이 먹자고 하는데... 맙소사 혜진이가 내 뒤자리였다. 그 후로 점심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배추벌레가 내 옆으로 와서 혜진이, 빡가(혜진이 짝, 성이 박 씨라 애들이 그렇게 불렀다.)와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운동선수 같은 애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먹었다. 어딜 가도 넉살 좋은 입심은 환영받았다.


도시락을 다 먹은 후엔 종종 혜진이가 전날 읽은 따끈따끈한 만화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연재가 끝나지 않은 별빛 속에(강경옥), 보헤미안랩소디(황미나), 아르미안의 네딸들(신일숙) 등의 최신 회차를 제일 먼저 읽고 썰을 풀었다. 혜진이는 대하드라마 뺨치는 원작의 방대한 서사를 이해하기 쉽게 기승전결을 요약하고 톤과 박자를 달리하는 쫄깃쫄깃한 화법으로 실감 나게 구연했다.


도시락을 5분 만에 순삭 한 후 혜진이는 연습장을 꺼낸다. 수학문제를 풀거나 영단어 암기의 흔적이 진득이 남아있는 페이지를 넘기다 빈 곳이 있으면 그곳이 바로 그날의 썰을 풀 자리가 되었다. 색색의 볼펜을 연습장 주위에 깔아놓은 후 검정 볼펜을 들고 빈 공간 한가운데 다양한 등장인물의 관계도를 유려한 손놀림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심을 집어넣은 볼펜으로 사건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행이 드러난 인물에겐 빨간색 볼펜으로 사정없이 밑줄을 치고, 예상치 못한 러브라인이 나타나면 연습장 한가득 하트가 반짝인다.


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혜진이가 잡고 있는 볼펜의 움직임을 따라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혜진이는 이런 우리를 위해 다 쓴 연습장도 늘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시간이 지나 다른 만화의 다음 회차가 나오면 혜진이는 여러 권의 연습장을 넘기며 이전에 그려둔 페이지를 찾아 다음 이야기를 이어갔다. 대여점과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와 배추벌레, 빡가는 혜진이를 만난 후로 만화책을 빌리거나 어쩌다 손에 쥐어져도 읽지 않는다. 선생님이 설명을 너무 잘하면 듣는 동안 내가 공부한 줄 착각해서 스스로 책을 펴지 않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조회 시간에 혜진이가 내 등을 톡톡 두들겼다. 전날 진짜 재밌는 책을 읽었다며 점심시간을 기대하라고 했다.


"제목이 '갈색 옷을 입는 사나이'야! 만화책은 아니고 추리소설이야."


솔직히 혜진이의 이야기에 빠져든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혜진이는 꿈에도 몰랐겠지만 순정만화 속 비련의 여주의 외모와 성격이 딱 혜진이였기 때문이다. 이쁜 줄 몰랐는데 꾸미니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반하고 굴곡진 세상사에 맞서는 당찬 성격과 2% 걸걸한 말투는 순정만화 속 캐릭터의 현신과 같아서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였다.


그러나 '갈색옷을 입은 사나이'에 나오는 앤 배딩필드는 혜진이 앞에 귀 기울이는 지지자들의 현실적 외모와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 중 누구에게 앤과 같이 눈앞에 누군가의 추락사고가 일어나고, 그 현장에서 사고와 관련된 좀 멋있게 생긴 남자가 떨어뜨린 쪽지를 주웠고, 쪽지엔 그 남자가 가려고 하는 어떤 장소가 적혀 있는데 마침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이 있다면... 열일곱 살의 우리는, 앞날이 그저 꽃길만 같을 거라는 희망이 가득한 우리는 서로의 등을 떠밀며 얼른 미지의 세상으로 몸을 던지라고 꽃을 뿌려 주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크리스티 여사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고 혜진이는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의 감탄과 아쉬움의 탄사가 늘어날수록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의자를 끌고 모여들었다. 어느새 교실은 혜진이의 책상을 무대로 한 고대 야외 원형극장의 모양새로 변신하였는데 더 극적인 건 이야기 하나에 울고 웃는 우리 반 모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유미가 없어도 더 이상 심심하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 스펙터클한 세상이 펼쳐지는 교실에서 나는 그야말로 충만한 고등학교 2학년을 보냈다.




'갈색 옷을 입은 사나이'로 시작된 추리소설 사랑은 학년이 바뀌고 혜진이와 배추벌레를 만나지 못해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시험이 끝나는 날이나 방학이 시작되면 새빨간 책등에 판다 마크와 해문이라는 출판사 로고가 박혀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한 권씩 사서 읽었다. 수고한 스스로에게 주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나이가 들면 영원할 것 같은 우정도 사랑도 희망도 모래알처럼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사라진다. 그 대신 아카시아, 유미, 배추벌레, 혜진이가 아로새긴 나의 열일곱 세상을 간직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80권 전권이 시골에 있는 친정집에 남아있다. 아니 남아 있었다. 어느 해 겨울 책등에 적힌 살인, 죽음, 피, 움직이는 손가락 등의 단어들이 무섭다며 보이는 족족 엄마가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해문사 80권 전권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장가치가 충분하다는 말씀을 미리 드리지 않은 내 탓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너 권이 살아남아 있어 서울로 가져왔다.


절망이 외로움이 덮치는 깜깜한 밤이 되면 늘 그랬듯 나는 이 책들로 손을 뻗는다. 오래된 책냄새를 들이마시며 누렇게 변색된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 시절 그 시공간으로 빠져 든다. 그곳엔 사시사철 아카시아가 흩날리고 하하 호호 향연 속에 나도 같이 웃고 있다.



덧, 항상 글을 쓰면서 나의 이야기가 읽은 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합니다. 특히 이번 글은 더 그랬지요. 그럼에도 쓰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행복한 기억을 소환해 주신 눈시울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애정하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을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왼쪽부터 바른손 캐릭터 태비치로(출처:모세스 음악여행), 화마에 살아남아 준 리스터데일 미스터리(애거서 크리스티, 해문)
왼쪽부터 리스터데일 미스터리 목차와 본문





매거진의 이전글 네일숍 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