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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14. 2022

긴 밤이 지나고

'오해'란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네가 잘못 이해한 것

이렇게 퍽하고 터져버렸다.


시간이 이만큼 지났으니 서로가 맘에 담고 있던 서운함 혹은 오해를 풀어버리자며 말을 꺼낸 어머니는 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해'란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네가 잘못 이해한 거라는 어느 소설 속 문장처럼 어머니도 똑같은 말을 했다. 소설처럼 오해긴 하나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기대한 건 역시 무리였나. 어머니는 어떤 말도 한 적이 없으며 누구 들은 사람이 있냐며 오히려 흥분의 기세를 높였다. 나만 들었으니 증인은 있을 리 없고 있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손에 들고 세차게 두근대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견디다 못해 터져 버린 이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이런 건가.


어느 날부턴가 의도가 다분한 말들이 하나 둘 날아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문장은 잊혀도 그 의도는 분명해진다. 이제는 의도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그것은 더 강한 숨을 불어 나를 휘감았다. 내 몸 구석구석으로 스미는 찬기에 이성도 감정도 제 기능을 잃고 얼어붙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모호해진 틈은 곧 우울이 제자리인 듯 자리를 잡았다. 참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기다리면 사라질 줄 알았다.


돌이킬 수도 돌이키고 싶지도 않은 그 날밤, 두 알밖에 남지 않은 안정제를 삼키고 잠을 청했다. 안정제가 없는 밤엔 수면제를 먹었다. 수면제가 없는 밤엔 알레르기 약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잊은 듯 끝인 듯 흘려보냈다.


*

아침햇살이 얼굴에 닿으니 그동안 겹겹이 눌러앉은 끈적한 미움들이 조금 말랑해진다. 어떤 방식으로든 마음을 내보일 수 있어 후련했기 때문이겠지.  

일주일이 지났다. 부엌 창 너머로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출근차량들이 이따금 지나가고 그 위로 연둣빛으로 물들어가는 산머리가 보인다. 딸각, 포트에 물을 채우고 스위치를 누른다. 머그컵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받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하며 전화를 건다.


몇 번의 신호음이 흐르는 동안 마음은 서늘해진다.


어머니는 "효정아... "하고는 잠시 머뭇거린다.

몇 초간의 정적으로 미움 아래 바짝 말라 붙어 있던 서운함마저 촉촉해져 버린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했어요!"

"나도 그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보니 아무 소리나 막하는 노인이 되어 버렸다. 내가 어쩌다 너한테 그런 소리들을 해왔는지... 내가 어쩌다 우리 사이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마음 풀어라!"

.

.

.


*

20년 전,  남편의 여자 친구로 처음 인사 가던 날, 그가 사는 아파트 앞에서 내 이름을 신나게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12층 베란다 난간 위로 온몸을 내맡긴 채 당신 아들과 나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손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를 처음 보았다. 어머니는 너무도 쉽게 며느리와 딸의 경계를 허물고 그렇게 나의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그러니 나로선 좋아할 수밖에...


되돌아보니 아들을 위해 무조건 품어야 할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런 어머니에게도 쉽지 않았나 보다. 나에 대한 배려와 경계의 감정들이 긴 시간을 두고 뒤죽박죽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애틋한 아들사랑이 도를 넘는 순간마다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시기,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우려와 원망 서린 어머니의 말씀들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도로 들렸다. 그럼에도 그 애틋함이 때때로 나로 향할 때, 그것은 친정부모의 사랑과는 또 다른 의미로 더없는 행복을 선사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자식은 부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본다. 어머니를 부모로 모시고 살아온 지난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내가 당당했던,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은 내가 날 세우며 세상을 비웃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끝나지 않을 긴 밤의 날들이 지나고 청명한 하늘빛과 햇살이 내 눈에 들어온 오늘 이 아침!

나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고, 말씀과 달리 어머니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도 안다. 그럼에도 마음이 살랑이는 건 '나도 그래'라는 그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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