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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26. 2023

완벽한 하루

2020년 3월

AM 5:00

한 번씩 화장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꾼다.

매번 다양한 형태로 망가진 화장실 칸칸을 헤매다 볼일을 볼 수 있으면 그날의 꿈은 그나마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화두를 던지듯 예상치 못한 동물이나 물건들이 등장하여 볼일을 방해한다.


급하게 겨우 찾은 화장실은 평소와 달리 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변기에 앉으려다 맞은편 벽 아래서 가지런히 놓여있는 연보라색 운동화를 보았다. 벽을 가린 벨벳 커튼이 운동화에 닿을락 말락 내려와 있어 수상했지만 분명 커튼과 운동화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하려는 순간 갑자기 커튼 뒤에서 희멀건 무언가가 휙 나오는 느낌이 들자 본능적으로 잠이 깨버렸다. 그러자 난데없이 들이닥친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거센 찬기운이 방안을 휘돌고 사라져 버렸다.


예전 같으면 그대로 가위에 눌려 꼼짝달싹 못하고 낑낑거렸겠지만 지금은 '엄마'이기 때문에 결계를 풀어내고 좀비처럼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이의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펴서 살포시 덮어준다. 그리고 당당하게 부엌으로 걸어가 잠들기 전 열어둔 창문을 닫는다.


AM 7:00

아이보리색 네스프레소 버튼을 누르자 깜박깜박 불빛이 들어온다.

어젯밤에 구워둔 고구마를 전자레인지에 1분간 데운다. 그 사이 버튼에 온전한 빛이 가득하면 캡슐을 넣고 커피를 내린다. 적당하게 데운 고구마와 커피 향이 감도는 애정 하는 포트메리온 머그잔을 들고 거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요가매트에 앉는다. 거실 창을 지나 노란색 커튼을 투과한 부드러운 햇빛이 거실 바닥으로 내비치자 이렇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12시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남편은 부모님 댁에서 휴가 중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잠이 줄고 일어나자마자 먹을 것을 찾는 남편의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갑자기 TV를 켜는 바람에 사라진 나의 조용한 아침도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


온 가족이 코로나19로 '기생충'가족이 되어 지난 두 주를 집안에 갇혀 보냈다.

학원은 일제히 휴강을 하고 중고등학교 개학도 한 주 미뤄졌다. 20년 근속 기념으로 45일간 휴가를 받은 남편도 계획했던 홀로 떠나는 여행을 결국 포기했다.

일주일 치 장을 보고 삼시세끼 밥을 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는 중 틈틈이 회사 일을 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매끼마다 두어 시간 먼저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맛이 없다며 슬며시 숟가락을 놓는 모습을 지켜보다 반 이상 남긴 음식을 치우고, 하루 종일 누워 핸드폰과 TV 시청으로 시간을 때우는 이들을 견디는 일이 점점 임계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침내 어제 아침, 늘어진 아이들 핑계를 대며 남편을 본가로 보내 버렸다. 물론 이쁘게 권유했다.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모처럼 효도도 하고, 어머님이 해주시는 맛있는 밥 먹고 살도 좀 찌고 오라고... 딸과 남편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애틋한 이별식을 했다. 현관문을 나서는 그에게 애들 개학 때까지 오지 말라며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손을 흔들었었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AM 9:00

회사가 시작하는 시간에 노트북을 연다.

메일을 체크하고 대표와 권 과장의 카톡을 기다리며 네이버 뉴스와 즐겨찾기 해 놓은 옷 가게를 훑어본다.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다. 오늘은 일거리가 없는 모양이다.   


AM 9:30

내가 원하는 시간에 TV를 켠다.

청명한 산골 마을 책방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겨울과 어울리는 시를 낭송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주에 새로 시작된 '날씨가 좋으면 찾아갈게요'라는 드라마가 재방송 중이다. 따뜻하고 느린 영상 속으로 두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드라마 분위기를 위해 적당히 살을 찌운 남자 배우와 이질적인 대조를 보여주는 인형 같은 여자 배우의 케미가 익숙해서 더 판타지스럽다. 주고받은 대사와 독백들 역시 이 세상 언어가 아닌 듯 메말랐던 가슴을 말랑말랑 물들인다.

원작 소설의 작가를 검색해 보니 나는 몰랐지만 이미 꽤 유명했다. 작가는 이 소설이 판타지 장르라고 했다. 어느 산골 마을, 찾는 사람도 없는 곳에 책방을 연 청년이나 글을 쓰고 독서 모임을 하는 동네 사람들, 가족과 친구 간의 대화 속에 서로를 대하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곳곳에서 묻어 나는 웃음소리...

작가의 현실을 직시한 발언에 100퍼센트 동감하며 오랜만에 정말 맘에 드는 작가를 발견한다.


AM 11:50

문득 글을 쓰곤 했다.

설거지를 하다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글이 쓰고 싶어 진다. 그래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느닷없이 좋은 작가를 만나면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이야기들을 타인에게 보여주고픈 용기는 어쩌자고 자꾸 생겨나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PM 12:10

이름은 스핀 스왈로 펌이다.

실상은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완성되는 제비집을 아들은 굳이 돈을 주고 만든다. 알람이 울리자 하얀 면티가 더없이 헐렁한 차림의 고3 아들이 제비집을 좌우로 흔들며 거실로 나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병째로 마신다.

드라마는 2회 끝을 달리고 있어 아침 인사는 생략한다. 아들이 머리를 내 오른쪽 팔에 비비며 곁에 눕는다. 밥을 달라는 신호다. 무엇을 내놓든 아들은 3분의 1일만 먹는다. 샤워를 하고 한 시간 동안 머리를 매만진다. 때론 다시 머리를 감고 또 한 시간을 정성 들이지만 내보기엔 이러나저러나 똑같다. 그러나 평온한 나의 하루를 위해 애써 무심한 척해야 한다. 팬티만 입은 깡마른 모습으로 안방에 들어가 아빠의 옷장을 헤집어 놓고 빈티지한 맨투맨 하나를 끌고 나간다. 순식간에 옷을 입고 오래된 내 향수를 온몸에 뿌리고 나타나 '아들 독서실 가니 칭찬해 줘!' 하며 손을 내민다. 하루치 용돈을 손에 올려주면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올 것이다.

'조금이라도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보다 '드디어 나가 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이 어쩔 수 없이 더 커서 미안하다.


PM 2:40

중학생인 딸은 수학 학원 갈 시간만 되면 배가 아프다.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10분에서 20분, 요즘은 40분으로 늘어났다.

세상에 학원은 많았지만 아이가 갈 수 있는 학원은 별로 없다. 그나마 남은 학원조차 두세 달을 못 버티고 다 때려치웠다. 여러 번 같은 문제를 물어보아도 짜증 내지 않는 선생님, 잘생긴 옆 학교 남자아이, 아이와 비슷한 수준의 친한 친구, 심지어 집에서 가깝기까지 한 학원은 여기뿐임을 아이와 나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 쓰는 시간을 몹시 아까워하는 아이는 몸으로 불편함을 표현하고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지만, 서로 '때려치워!'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게 하려고 참고 있는 중이다.


드디어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는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났다. 오늘도 학원에 전화를 한다. 죄송하지만 저녁에 보내겠다고.


PM 4:22

'어딜 갔다 와?'

동네 친구 혜경의 카톡이 울렸다.


'무슨 소리?'

'나 너네 차 뒤에 있어!'


남편이 돌아왔다. 안방에 누워 있던 딸이 7분 전에 '아빠 보고 싶어'라고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40분 거리의 분당에서 7분 만에 집으로 온 것이다. 남편은 옷 가방 안에서 부모님 몰래 마시려고 챙겨 갔던 콜라 세 병을 연달아 꺼내 냉장고에 집어넣는다. 본인도 멋쩍은지 계속 내 눈치를 보며 실실 웃는다.

평생 체중미달인 남편을 애달아하시는 시부모님은 30분마다 정성을 다해 마련한 건강한 식사와 간식, 영양제를 번갈아 아들 입에 넣어주셨을 것이다. 이틀 만에 도망쳐 온 그는 당분간 먹지 않겠노라 선언한다.


PM 5:00

노란색 점퍼를 입은 단아한 모습의 교육부 장관이 TV에서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고등학교의 개학을 2주 더 연기하겠다고 선포한다. 남편은 딸한테 조그맣게 말한다.

"려원아! 그래도 조금씩 공부는 해야 돼!.. 그래야 아빠가 분당에 안 가!"


PM 8:00

아들이 샤워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호기롭게 '완벽한 하루'라는 제목을 떠올리고 이 글은 시작되었다.

모처럼 온전한 내 시간, 내 감성을 누려 볼 수 있었던 그때까지만 해도 제목처럼 될 거라 기대하며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겨 댔었다. 지금은 딸의 수학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완벽'이라는 단어와 나의 일상은 매번 이런 식으로 '완벽'하게 틀어진다. 가족이 서로 문대며 살아가는 현실 속의 나는 틈만 나면 홀로 있는 풍경을 판타지로 대치한다.


음.... 그런 의미라면 판타지 안팎을 넘나들던 '오늘은 정말 완벽했다'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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