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습하고 무더웠던 여름날이었다. 한동안 안 입었던 파란색 베이비돌 원피스를 꺼내 놓고 입을까 말까 고민을 했다. 나의 체형을 가리는 데 적격인 옷인데도 망설여지는 건 마흔을 막 지나가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함' 때문이었다. 하원하는 아이를 데리고 동네 마트로 다녀오는 20여분 동안 '설마 아는 사람을 만나진 않겠지' 하며 원피스를 훌렁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일렬로 서 있는 몇 개의 아파트를 지나 외부세계와 아파트 단지를 이어주는 쪽문 앞에서 아이의 학원버스를 기다렸다. 무심코 발등을 내려다보니 털이 복실한 송충이 몇 마리가 내 신발 주위로 꿈틀꿈틀 모여들고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테두리에는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13층 아파트보다 더 크고 더 건장하게 자라고 그만큼 송충이를 볼 수 있는 날은 매년 줄어들고 있다. 어쩌다 가끔 송충이가 눈에 담아지면 그 길로는 걷기 싫어진다.
그 어쩌다 가끔인 그날 아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늘 가던 길이 아닌 건너편 인도를 따라 마트로 향했다. 아이의 재잘대는 소리에 맞장구를 치다 마주 오는 모녀와 눈이 마주쳤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삶은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준비한다.
철저한 계획으로 서로의 마음이 쌓이고 쌓인 어느 날을 우연인 척 선택한다.
"지연아!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 동네에서 자랐다. 잠시 반포에서 살다가 결혼을 하고 다시 이곳으로 소환되었다. 지연이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미술학원에서 만난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였고 지연이 어머니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생물 선생님이셨다. 지연이와 선생님은 선생님께서 재직하실 때 지연이 이름으로 들어둔 은행 적금이 만기 되어 찾으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은행은 내가 가려던 마트 1층에 있다.)
15년 만에 만난 지연이는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 찰랑이는 단발머리를 정갈하게 하나로 묶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10년은 사라진 모습이었다. 한 손에는 부채를 다른 손에는 손수건을 쥐고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연이가 계속 짜증을 냈을 거라며 고맙다고 하셨다. 반가움에 빨라진 심장소리를 느끼며 지연이와 연락처를 주고받고 가까운 시일에 제대로 만나기로 했다. 툭! 하고 마음 한편에 간직한 지연이 서랍이 튀어나왔다.
"엄마? 엄마 친구 맞아? 되게 이쁘다!"
사라져 가는 지연이를 뒤돌아 보던 아이가 해맑게 말했다.
며칠 후 지연이는 그날처럼 간결한 차림새에 직접 만든 에코백을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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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학원 다닐 때 지연이 그림이 생각났다. 부모님 학력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던 지연이는 선생님(지연이 어머니) 손에 이끌려 미술학원에 왔다고 했다.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우린 성실하게 매일을 데생 연습으로 채웠다.
지연이는 부모님이 선생님인데도 선생님들 앞에서 늘 주눅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없는 저녁시간이나 학원이 끝난 후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는 내가 너무나도 기대하는 지연이 세상이 펼쳐졌다. 아마도 내가 입시를 즐거운 마음으로 버터낼 수 있었던 8할은 지연이 덕분일 것이다.
이 친구의 눈으로 들여다본 우리들의 일상은 어느 시트콤이나 코미디보다 이상하게 낯설고 웃겼다. 또 당시 유행하던 춤과 노래를 그대로 복사해내는 능력은 내가 만난 어떤 이보다도 탁월했다. 목소리가 낮아 고음이 잘 나오지 않아도 팔딱팔딱 날뛰며 노래부를 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자신이 넘쳐흘렀다. 나는 지연이의 독무대를 만끽한 후 매일 밤 스트레스 제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지연이는 자유의지로 발산되는 이이디어와 공예적 손재주가 남달랐다. 이러한 특별함은 지연이와 친해져야만 알 수 있어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친구의 능력을 알아봐 주길 늘 기대했었다. 지연이는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 의상학과를 별다른 고민 없이 선택했지만 학교가 멀다고 종종 투덜거렸다. 어쨌거나 지연이가 선택하거나 손수 만든 가방, 블라우스, 액세서리 등은 언제나 탐이 날 정도로 이뻤고 무엇보다 편했다.
각자 다른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꼭 만났다. 내쪽에서 거의 연락을 하고 만나면 지연이의 입담에 나는 거의 실신하듯 웃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명동에서 만난 지연이는 6센티 굽이 있는 갈색의 연한 호피무늬 구두를 신고 나왔다. 나는 한참 동안 친구의 선택에 찬사를 보냈고 본인도 정말 애정 하는 아이템이라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어느 카페에서 만난 지연이는 뭔지 모를 웃음을 머금고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입을 뗐다. 어느 때처럼 그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다 갑자기 굽이 부러지던 날 '남동생이 자살했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한동안 멍하니 나는 지연이의 얼굴을 지연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니 그 만남 이후로 우리는 좀 소원해진 게 아닐까 싶다. 같이 있으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호피 구두가 생각날 테고 그러면 그 구두의 굽이 부러진 날이 떠오를 테니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지연이는 대치동의 한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미술학원의 트렌드가 만들기 위주의 체험미술 수업으로 막 변화하는 시점이라 친구의 천진난만한 성정과 틀을 깬 수공예적 표현력은 빛을 발했다. 작은 학원은 금세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인기를 끌며 유명해졌다. 원장 선생님은 넘치게 칭찬을 했고 급여는 인색했다. 어른들의 칭찬과 인정을 처음으로 받아 본 친구는 몸이 상하는 줄 모르고 밤낮 아이디어를 짜고 준비물을 챙기고 수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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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을 병원에서 살았어. 암 이래! 수술하고 항암 치료를 받고 그렇게 겨우 집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엉덩이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이번엔 골육종 암이라 하네. 또 수술하고 이제 일 년쯤 됐어. 이번 주에 수술 후 첫 번째 항암 결과가 나와. 몸이 많이 약해졌어. 한여름과 한겨울은 집 밖을 못 나가! 금방 지치기도 하고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까.
우리가 다시 만난 날도 꼭 내가 가야지만 적금을 탈 수 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간 거지만 실은 너를 만날 수도 있겠다 하는 희망도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너는 뭔가를 잘 해내고 있을 것 같아 인터넷으로 가끔 네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었어."
지연인 세상이 정해준 틀을 반항 없이 받아들였던 나를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대화는 예전처럼 지연이가 끌고 갔다. 아프고 슬픈 이야기들이 지연이 입을 통하면 나는 잠시 친구의 상태를 잊고 속없이 웃었다.
"명품을 직구해서 언니네 학교 선생님들한테 팔기도 하고 가끔씩 동화 일러스트도 해. 소소한 물건들은 직접 만들고 쓰다가 그냥 버려. 하하! 지속적인 직장생활은 어려우니까... 좀 심심해!
학교 다닐 때 그토록 살을 빼고 싶었는데... 항암으로 저절로 살이 빠지니 원 없이 꾸며도 봤지! 아주 진한 스모키 화장도, 야한 옷도 입어 봤는데 그것도 이젠 시시해서 안 해! "
병원을 오가는 일이 외출의 전부였던 지연이는 그 날 만큼은 공들여 화장을 하고 스스로 정한 콘셉트에 맞는 옷을 입는다고 했다. 화사하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가끔 연세 있는 분들이 얼른 시집가라고 재촉한다고 했다. 그러면 조용히 웃으면서 '저는 아기를 못 가져요'라고 답을 하면 다들 거짓말인 줄 안다고 했다. 내 눈에도 거짓말처럼 보였다. 그날 내 앞에 앉아 있던 친구는 발그레 홍조가 살짝 올라온 건강한 모습이었으니까.
"나는 아픈데 엄마도 겉만 보고 괜찮은 줄 알아. 실은 매일매일이 무서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의 문턱을 오갔던 날들이 자꾸 생각나거든. 아는 사람이 암이라고 하면 더 이상 연락할 수 없어져. 그날부터 한동안은 더 힘들지... 원장 선생님은 아직도 한 번씩 일하러 나오라고 하는데 고맙기도 하지만 미운 마음이 커. 그렇게 칭찬만 안 했어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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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이 지나 겨울이 되었다. 날이 추워져 지연이네 동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로부터 삼일 전에 칠순을 막 넘기신 친정아버지가 위암 4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서울의 여러 병원에 검사예약을 다시 하고 매 순간 신중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암환자의 보호자가 되었다. 약속을 미뤄야 해서 망설이다 지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다고 했다.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목소리 너머로 떨림이 전해졌다. 지연이는 두 번째 항암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도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수술 후 다행히 위암 1기로 정정되었고 그 후 일 년간 항암 치료를 받으셨다. 아버지가 괜찮아지셨다고 지연이에게 알려야 했는데 결국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연락을 못하고 있다. 계절이 바뀌거나 해가 바뀌거나 다시 만난 날처럼 습기로 찐득한 무더운 여름날은 특히 더 생각나 친구의 카톡 프사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통화 이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는 '핑크색 아기돼지 인형' 사진(어린 시절의 지연이와 닮았다)은 매번 누르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지연이가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을 그럼에도 기다리고 있을 것을 아는데도 말이다.
삶은 또다시 나 몰래 선택한 어느 날 내가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에서 골육종 암에 투병 중인 유명 배우를 보게 했다. 그는 치료 약이 없는 이 암을 동반자로 인정하고, 하고 싶은 일들을 더 열심히 해내고 있었다. 아프기 전보다 더 빛나는 모습이었다. 미안함을 앞선 두려움을 이겨낼 시간과 용기가 이제 거의 다 찼다고 알리는 듯했다.
정말 오랜만에 핑크색 아기돼지 인형을 눌러본다. 인형의 눈 주위로 빛바랜 노란 얼룩이 이제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