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오전 2시, 어김없이 오늘도 이 시간에 잠이 깬다.
저녁으로 구웠던 삼겹살 냄새가 아직도 집안 곳곳에 떠돌고 있다. 느끼하고 비릿한 내가 속을 불편하게 한다. 늘 그렇듯 태연하게 예측할 수 없는 높낮이로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본다.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반대편 방향으로 돌리려다 만다. 잠이 다시 들긴 글렀다. 베개를 껴안고 거실로 나온다. 안방과 아이들 방 문을 모두 닫고 거실이라도 환기시킬 요량으로 마주 보는 부엌 창과 거실 창을 모두 연다. 불 꺼진 거실에서 요가 매트에 앉아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다. 창 밖으로 이따금 묵직한 바람이 들어오면 저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간다. 바람이 방충망 사이로 흘러 들어온다. 잘 반죽된 밀가루 덩어리가 체망을 통과하여 수백 개 수천 개 국수가락으로 밀려 나오듯 그것은 촘촘한 망 사이로 갈래갈래 삐져나온다. 유려한 몸짓으로 다시 한 몸이 되는 순간 내 얼굴을 휘감는다. 떨어져 볼까!
날이 어스름 밝아오기 시작하자 문득 정신이 든다. 시계를 보니 작은 바늘이 5를 가리킨다. 세 시간 가까이 방충망에 얼굴을 대고 바람을 맞서며 서있었지만 아무 일 없는 듯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깨운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만 깨어있는 시간에 일어난 일은 정해진 일과의 한 부분처럼 6년간 지속되었다. 최근에서야 그 행위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친구는 아들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한강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아들의 발이 강물에 닿기 전에 친구는 아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아들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은 해질 대로 헤져서 어떤 감정이 그 상황에 정당한 건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몇 달 후 친구 역시 두 번째 시도를 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다행히 빨리 발견되었다. 아들은 살렸지만 친구는 남편과 연락이 닿을 때마다 번번이 무너졌다. 후에 의료진, 변호사,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친구는 그 순간의 느낌을 들려주었다. 세 아이의 엄마인 친구는 시트 자락을 천정 고리에 걸면서도 아이들은커녕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본인의 삶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든 남편에 대한 원망, 복수심마저도 그 순간만은 사라졌다고 하니 마음이 저 너머로 쉽게 빠져버리는 게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고도 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져서야 아이들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는 다시 삶을 추슬렀다.
스스로 삶을 놓아버리는 일은 입에 올려서도 방관해서도 안된다고 배웠다.
정작 본인의 상황이 되어버리면 그것만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최후의 안식임을 나도 친구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간혹 전해지는 누군가의 안타까움이 납득이 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그렇게 내몬 현실에 대한 슬픈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
그녀의 소식을 네이버 뉴스를 통해 알았다.
사인은 햇빛 알레르기로 인한 우울증이라고 한다. 그녀를 간호했던 어머니마저 혼자 보낼 수 없어 딸과 함께 가는 길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말과 글을 남겼다. 며칠 동안 부고를 전하는 기사에 달려있던 댓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대부분은 그녀가 대중에게 남긴 품격 있는 말들을 기억했고, 누군가는 햇빛 알레르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며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마음 깊이 아파했다. 또 누군가는 학창 시절 무리한 피부과 시술이 햇빛 알레르기의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심증으로 인과관계를 따졌다. 아토피 아이를 둔 지인은 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지켜보며 자신의 아이의 미래가 될까 우려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좀처럼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택한 방법보다 더 나은 방법도 찾지 못했다. 펭수를 좋아할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녀의 맑은 모습 뒤에 자리 잡은 한가득 어둠을 몰라 본 자책감이 마음을 꾹꾹 눌렀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마음이 쓰일까? 그 연유를 생각해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황은 다르지만 나와 친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햇살과 자식'이라는 '희망과 책임감'이 이들 모녀에게는 정반대의 의미로 작용했겠구나. 참 아이러니한 세상사에 미안한 마음이 쓰나미가 되어 밀려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5개월이 지났다.
팬데믹도 이젠 만성이 되었다. 코로나 일선에 있지 않는 한 일상은 비교적 잠잠하다. 오늘은 모처럼 일찍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옅은 분홍빛깔의 벚꽃잎이 보도블록을 수놓았다. 나는 그 위를 걸으며 회사로 향한다. 아직도 아침햇살은 차갑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맑게 햇살을 누리는 습관이 나도 모르게 나온다.
그녀가 생각난다.
환하게 웃음 짓던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애도한다.
아픔이 없는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이 세상에서 펼치지 못했던 재능을 원 없이 펼치며 신나게, 더 신나게 삶을 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