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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Nov 02. 2022

월요일 단상

내게 사랑이 있었던가? _1706231740

마침내 도착한 그곳은 아담한 지하공간에 자리한 대형서점이었다. 몇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 들러 새책을 내 책처럼 읽고 신간을 기웃거리며 아이들 교재도 구경하는 곳이다. 읽지 않아도 이해를 못해도 네 모서리가 사람의 손때가 닿지 않은 채 갖가지 분류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풍경에서 나는 마음의 위안을 받는다. 내 팔을 스치는 치맛자락의 사라락 소리를 의식하며 손에 든 책은 가트먼 박사의 부부치료에 관한 책이었다. 차례를 읽어보고 나의 상황과 비슷한 장을 펼쳐보았다.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 할 수 없는 일을 조언해준다면 과연 그것은 가능한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언제나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보다 못 느끼는 사람에게 더 필요한 책들이 많은 건 참 슬픈 일이다.


서둘러 다른  신간으로 눈을 돌리다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집어 들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서가 근처에 자리한 작은 티테이블에는 체격이 있는 사오십대 남자가 어깨를 웅크리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 자리가 있어 살짝 머리를 까딱하고 앉았다. 책 표지를 넘기고 작가의 프로필을 보고 잠시 놀랐다. 이름으로 중국인일 거라 짐작했었던 탓이다. 생각해보니 붉은 수수밭을 감독한 중국 영화감독(장예모)의 이름과 혼돈했던 모양이다.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난 후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이 아주 재밌지 않은 한 또는 특별한 생각거리가 있지 않는 한, 맞은편의 사람이 어떤 책을 읽는지 이 시간 - 평일 오전 -에 책을 사러 혹은 읽으러 오는 남자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딱히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월요일과 화요일이 휴가란다. 모회사 건설회사에서 일을 하나보다. 휴가라 서점에 들른 남자의 얼굴이 보고 싶어 힐끔 쳐다보았다. 남자는 미안했는지 통화를 하는 중에 테이블에 놓여있던 몇 가지 책들을 하나씩 위로 쌓으면서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마도 내가 시끄럽다고 쳐다본 줄 알았나 보다. 되는대로 쌓인 책들의 제목들은 하나같이 직장생활을 잘하기 위한 처세술에 관한 것들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남자는 자리로 돌아와 책을 추스르고 자리를 떠났다.


무릎 위에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폰이 핸드폰에 끼워있는 것이 생각나 가방에서 핸드폰을 내니  개의 메시지들이 액정에  있었다. 눈물이 눈에 맺히고 이내 손등으로 떨어진다.


" 미안해요. 내 생각만 해서 "




내게 사랑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처음 만난 날,  내가 좋아하는 걸 그도 늘 즐겨한다고 했고 나도 그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신기해했고 우리는 바람직한 관계라고 자신했었다. 2년 여의 연애기간 동안 우리는 졸업을 하고 취업을 했다. 나는 그에게 결혼할 생각이 없으면 헤어지자고 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상견례 일정을 잡았다.


혼자 살아본 적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썼다. 둘 다 치맛바람이 센 엄마들의 잔소리에 질려 못마땅한 행동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늘 쫓기듯 살아온 지난날로부터 해방되어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생활했다. 주말이면 오후 3~4시까지 늦잠을 자고 씻고 싶을 때까지 버티고 몽실몽실 뭉쳐진 먼지가 강아지처럼 돌아다녀도 개의치 않았다. 그제야 안건 그는 내가 좋아하는 걸을 단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가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은 사기다. 사기는 곧 들통나기 마련이다.


어린 부부는 모든 면에서 서툴렀다.

때때마다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날들에 의기소침했다. 하나씩 태어나는 아이들을 정말 사랑했지만 양육하는 법을 몰랐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버텨내는 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라 여겼던 그와 밤낮이 없는 연구원 생활에 지쳐 육아를 핑계로 일을 그만둘 수 있었던 나는 각자의 영역에 머무르며 절대로 그 영역을 넘어서는 배려와 요구는 바라지 않았다. 그는 회사일에 지쳐갈수록 돈 안 드는 취미생활이라는 정당성을 주장하며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늘려 갔고 나는 그런 그가 안쓰러워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돌아다녔다. 큰 아이가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가 오자 그동안 서로 말하지 않고 견뎌온 일상이 조금씩 흔들렸다. 아이의 변화를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던 그는 아이를 비난했고 나는 그에게 화를 냈다. 아빠에게 아이를 이해할 기회와 시간을 주지 않았던 나도 잘못이지만 아이보다 본인의 취미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도 이제는 변해야 했다.


냉랭한 주말을 보내고 그는 결혼 후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서로의 등을 맞댄 채... 그는 여전히 휴대폰 게임을 사랑하고 나는 종이 냄새를 좋아한다. 오늘도 나는 그의 장난감을 흘겨보고, 그는 가끔씩 내게 책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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