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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27. 2023

나 설명서

2305141205 _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나 설명서_

'나 설명서'를 목에 걸고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나 설명서'를 목에 걸고 다니면 조금은 나를 이해해 주겠지

설사 이해하지 않더라도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알아주겠지

하는 작은 소망을 품고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조차도 가전제품에 딸려있는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는다. 어딘가 처박혀 있는 사용설명서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 말고는...


엊저녁 독서모임에서 오랜만에 ‘나 설명서'를 떠올렸다. 이번 독서 모임에 선정된 책은 내가 별생각 없이 추천한 책이다. 몇 해째 계속해오고 있는 독서모임에 최근 들어 선정된 책들은 내 기준에서 꽤나 어렵기도 잘 읽히지도 않는 주제들의 책이었다. 예를 들면 쿼런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독서모임의 룰은 다수의 회원들이 책을 추천해서 투표를 한다. 투표결과 최종 선정된 책을 추천한 회원은 발제문을 준비해야 한다. 회원들의 발제문은 날이 갈수록 지성과 담론을 담아내는 장이 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얕디 얕은 지식의 소유자인 나는 발제문이 꽤 큰 부담이 되었다. 쉽게 읽히는 책을 추천하면 눈높이가 높은 멤버들이 다른 책에 투표하겠지 하는 얄팍한 나의 생각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책이 선정되었을 때 나는 알아봤어야 했다. 다수결로 선정된 책은 멤버들의 과반수를 넘기지 못했고 그 결과 20여 명의 회원 중 절반만 모임에 나왔다. 그중 절반도 내가 추천한 책과 작가에 대한 반감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다.


별생각 없는 추천이라 했지만 여전히 하루키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러기에 독서모임에서 하루키를 대변하느라 진땀을 뺐다. 생각보다 하루키를 어려워하는 2~30대가 많은 것도 신기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발제한 질문에 선뜻 의견을 내지 않았고 나는 질문을 이해시키기 위해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이해가  된다는 냉랭하기까지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책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일부 말문을  멤버들은 원색적인 문장과 일방적인 내레이션에 불편함을 토로하며 문학성을 의심했고 뜬금없이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에 전혀 공감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충분히 맞는 의견이고 하루키도 내내 그런 말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간이 콩알만 해졌는지 단지  하나를 추천했을 뿐인데 나의 문학적 수준을 평가받는  같아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 기억 너머로 사라졌던 ' 설명서' 소환하며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남겨보고 싶어졌다.




하루키는 나의 20대를 온통 사로잡은 작가다. 하루키 이전에도 많은 작가들을 애정했지만 그만큼 직관적 어휘를 사용하는 작가를 본 적 없었기에 더더욱 빠져들었다. 문장은 간결했고 장면들은 명확했다. 감정은 때론 솔직했고 때론 이중적이다. 스토리는 우화적이고 우의적이다. 이런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과 동일한 감정을 줄곧 느끼고 살아왔기 때문인지 그 기시감에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물론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몇몇 장편소설은 따라가기 어려워 선호하지 않지만 단편소설들은 단연 최고다. 특히 『TV피플』,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는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나와 너의 관계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하루키의 단편소설들은 나의 일상과 언제나 맞닿아 있다. 나이가 들면서 뉴스에 흘러나오는 세상사, 혹은 거대 담론은 내 개인사와 무관하게 흘러가곤 했다. 강 건너 불과 같은 시류에 관심을 쏟기엔 하루하루는 참 버겁고 단출했기 때문이다.


      

『일인칭 단수는』는 2020년 11월에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소설이자 표제작인 <일인칭 단수>는 70대 노작가의 명쾌한 시선을 볼 수 있다. 작가인생 50년을 살아온 하루키가 그간 수많은 타인들로부터 받아온 혹평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살며시 들이밀며 발제문을 올려본다.   



발제문 1.

철학자 질 들뢰즈는 ‘리좀’이라는 글에서 좋은 책은 ‘공명’이 아니라 ‘감염’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에 확신을 주고 울림을 주는 책보다는, 오히려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을 깨닫게 하고, 생각은 물론 행동까지도 변화시키는 책을 옹호한 것입니다. 사실, 들뢰즈가 공명과 감염으로 구분한 문학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극한 사적인 ‘나’가 모든 의미와 가치의 중심이 되는 하루키 문학을 읽다 보면 개인의 고통쯤이야 사소한 일로 치부하려는 일상의 폭력에 맞서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거대담론에서 개인으로 회귀하고 자유롭고 싶다는 현시대의 독자 또는 작가들에게 정치 사회소설이 아니어도 연애소설도 문학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김춘미. 2007.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그 외연과 내포. 비평 17호. 생각의 나무) 이 지점이 감염이 아닐까 싶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발제문 2.  

일인칭 단수는 가장 개인적인, 가장 보편적인 기억과 기록의 주인공 ‘나’라는 소우주를 탐색하는 8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이 단편소설들은 작가 특유의 미스터리한 세계관과 직관적이며 감각적인 문체, 일인칭 주인공 ‘나’와 만났던 일회성 관계들이 불러내는 나비효과의 경험, 다소 이해불가한 기억들을 에세이인 듯 소설인 듯 그려내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에 데자뷔를 불러일으키는 단편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발제문 3.  

<크림>에 등장하는 의문의 할아버지가 ‘나’에게 생각해 보라는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은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것들일까요? 또 현재 여러분 삶에서 크림, 가장 중요한 에센스는 무엇인가요?  


     

발제문 4.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란 책에서 “당신은 이야기를 만드는 ‘메이커’이자 동시에 이야기를 체험하는 ‘플레이어’이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2018년 에콰도르 문학의 밤에 초청된 하루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육체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맥주를 마시는 주인공에 대해 쓰면 독자들이 맥주를 마시고 싶게 만들고 싶습니다. 저는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있게 한, 무엇보다 정확한, 억제할 수 없는 신체적인 반응의 힘을 믿습니다. 이런 관점이 제 소설에도 투영하고 싶은 겁니다. 소설 속의 한 주인공이 아프면 독자들도 똑같이 아픔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것이 제 소설의 하나의 목표입니다.”


글(에세이, 소설 등)을 쓸 때 여러분의 유일한 목표, 지향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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