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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May 07. 2022

다시, 시작

전시기획자, 노느니 일한다.

- 사무실 레이아웃을 변경할 예정인데 일주일에 몇 번 나올 실 수 있나요? 전에 2~3일은 가능하다고 해서 연락드렸어요.


- 아 제가요? 음... 주 삼일은 어렵고 이틀 정도는 가능하긴 한데 혹시 제 자리는 있나요?


- 그럼요. 전 선생님이 쉬시는 동안 회사에 일이 많아져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이 많아졌어요.

  근무하기 편한 환경으로 사무실 레이아웃을 다시 구상 중인데 당연히 선생님 자리는 있지요.


- 알겠습니다. 대표님을 뵐 수 있는 요일을 감안하면 월요일과 화요일이 좋겠네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나는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대표는 꼬박꼬박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그 속내는 나만 안다. 학연으로 이어진 대외적인 명분 60%, 적은 월급에도 야근과 주말을 불평 없이 온전히 본인에게 내어준 지난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40%. 나도 사람인지라 재택근무를 조건으로 입사한 지 4년쯤 된 어느 날 퇴직을 신청했지만 대표는 유급휴직으로 처리했다. 6개월 후 복직하기 한 주 전에 대표는 주 이틀 또는 삼일 출근 여부를 뜬금없이 물어보았다.  


회사는 합정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5층짜리 건물 맨 위층에 있다.  반년 전 마지막으로 갔을 때 사무실 밖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바퀴벌레를 만난 이후로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6개월간의 짧은 프리랜서 생활을 맛본 후  슬그머니 결심은 사라지고 대표의 출근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반갑기까지 했다. 프리랜서는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두배의 수입을 보장했지만 항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비록 일주일에 두 번일지라도 매번 자리가 변경되지 않고 직원들 사이에 배치된 나의 책상을 가진 직장은 거진 20년 만인 듯 싶다. '아이 귀찮아'하면서도 직장인 코스프레를 위해 반반한 옷들도 사고 가방도 샀다.


*

눈대중으로 30평가량 되어 보이는 사무실은 여전히 바쁨의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출입문 옆에 자리한 복사기가 간헐적으로 A4 종이를 뱉어내고 컬러풀한 제안서들이 바닥과 책장, 창틀 곳곳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발주처 혹은 거래처와 통화하는 부장과 이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어디선가 들리는 미세하고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화음을 쌓았다. 긴박하진 않지만 무언가를 도와달라는 대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이내 '네'하며 달려가는 권 과장의 모습이 스쳤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듯 앳된 얼굴의 세 명의 신입들이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중 남자 직원이 내 자리로 보이는 곳에 놓인 물건들을 급하게 치우고는 나를 안내했다. 레이아웃은커녕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무실 모습에 나는 실망했다.


사무실은 대략 3개의 존으로 나뉘어 있다. 사무실 출입문을 열면 경리부와 대표실이 바로 보인다. 그 오른편은 내 자리가 있는 기획과 디자인팀, 왼쪽에는 설계와 시공담당 프리랜서들 공간이다. 한 때 전시업계에서 1, 2위를 다툴 만큼, 합정역 바로 앞에 7층짜리 사옥을 지어 100여 명 직원들이 상주했을 만큼 규모를 자랑하던 회사였지만 3년 전 이 사무실로 이전하면서 서가에 꽂힌 수많은 제안서와 설계설명서만이 그때의 영광을 기억할 뿐이다. 10분의 1로 줄어든 사무실 공간에 맞추어 웬만한 것은 다 버린다 해도 결코 버릴 수 없는 것이 작은 도서관 분량의 분야별 도서와 수십대의 컴퓨터이다. 이제는 주인을 잃었거나 제 자리가 없는 이들을 철커덕 가둬버린 크고 작은 책장들이 난해한 미로를 만들고 막다른 곳마다 직원들 책상이 보물상자처럼 숨어있다. 게다가 10명 남짓한 직원들이 개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눈높이 파티션으로 이리저리 때때마다 구획을 나누어 놓는 바람에 창이 있어도, 수많은 LED로 공간을 밝혀도 사무실을 여전히 어둡다. 갑갑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창문을 찾았다. 이 와중에 창가에 자리한 마음씨 고운 어린 직원이 창틀에 놓인 손바닥만 한 화분 위로 푸릇한 이파리 몇 개가 달려있는 식물에 물을 주며 살뜰히 보살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통에 폐허가 된 흙더미를 뚫고 싹을 틔운 새싹을 만난 것처럼 나는 자그마한 희망을 보았다.    


책상 위를 물티슈로 닦고 서랍 안을 비웠다. 내가 일하는 방식으로 2대의 모니터를 배치한 후 손에 익숙한 무소음 마우스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곧이어 대표가 호출했다. 50대 중반의 대표는 170cm가 넘는 장신에 어울리는 회색 슬랙스와 빨간색 터틀넥 스웨트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를 질끈 묶으며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여전히 고우시네요'하며  말문을 열었다가 대표의 전화벨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최소 20분 이상은 원치 않게 대표의 통화소리를 들어야 했다. 대표는 통화 중에 내 얼굴을 보며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통화가 끝나자 한 달 후 제출해야 할 서너 개의 제안서와 진행 중인 실시설계 상황을 이야기했다. 적당히 공감하는 척 이해하는 척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실 문을 나서자 한숨이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쌓아둔 폭탄이 '팡' 터진 것이다.


자리로 이동하는 중에 여전히 들리는 코 고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휴직 전 함께 일했던 설계 담당 배 이사가 보였다. 나이는 나보다 두세 살 많았지만 희끗한 머릿 색으로 완성한 힙한 스타일에 한쪽 귀에만 십자가 귀걸이를 하고 있어 게이인 줄 알았다. 나중에 최부장을 통해 들은 바로 그는 터울이 1년이 채 안 되는 장성한 두 딸을 두었고, 집이 먼 탓에 작업량이 많은 주간에는 3~4일 이상을 퇴근하지 않고 회사 책상에서 쪽잠을 잔다고 한다. 아무도 그의 코 고는 소리를 탓하지 않았고 그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면 다들 못 들은 척 이어폰을 낀다. 머리 받침대가 없는 의자에 고개를 꼬꾸라트리고 팔짱을 낀 채 숨소리를 내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무실 레이아웃이 빨리 변경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

20년 주부생활의 습관으로 사무실 곳곳을 둘러보았다. 탕비실과 창고, 화장실은 6개월 전과 똑같이 어지럽고 하얀 물때와 곰팡이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제야 사무실은 눈대중보다 2배는 넓은 공간임을 알아차렸다. 충분히 편리하고 재밌는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공간을 다루는 회사임에도 넘쳐나는 일에 치여 정작 자신들의 공간은 쓰레기 더미와 함께 불편한 동선과 가구 배치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괜스레 짠한 마음에 경리부 김 과장과 점심을 먹을 때 사무실 레이아웃을 왜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김 과장은 건물 주인이 몇 주 전 바뀌어 사무실 재계약이 불투명해진 탓이라고 했다.


그래도 화장실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건물 관리인이 화장실 청소를 해주고 있지만 그는 바퀴벌레가 나올 만큼만 일하고 있으니 여직원들이 쓰는 화장실은 내가 청소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과장으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아 청소도구를 사러 나서니 식물에 물을 주던 어린 사원이 따라 나왔다.


- 선생님! 저도 늘 화장실이 별로였어요. 저도 같이 청소할게요!


공간은 사는 사람의 품격을 보여준다. 그에 앞서 사는 사람의 자존감을 올려준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 만족하기 위해 나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탕비실과 창고를 정리하고 내 주변의 가구들을 재배치하려고 한다.

일은 뭐 늘 그렇듯 밤을 새우면 된다.


*

덧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무실은 재계약이 확정되어 나와 김 과장(나보다 한 살 어린 베테랑 주부다.)의 강력한 요구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그럴듯한 공간으로 리모델링되었다. 2015년 이전의 책들과 불필요한 컴퓨터, 사무용품들은 과감히 처분하여 한층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했다. 대표가 쟁여 둔 애정 하는 전이수 작가의 그림들이 빈 벽을 채우며 사무실 풍경을 담당했다. 주 5일을 출장 중인 대표의 업무 패턴을  반영하여 대표실은 사라졌다. 그 대신 크고 작은 회의실을 배치하여 화상회의와 프로젝트 업무에 용이한 진정한 의미의 위워크 공간이 탄생했다. 사무실 환경이 바뀌니 대표도 화장실과 탕비실이 눈에 거슬렸는지 어느 날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했다. 더는 화장실을 청소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비록 호텔 화장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곳은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온전한 공간으로 새로고침 되었다. 


그리고 지금, 올해의 연봉협상을 마쳤다. 대표는 '그렇게 하시죠!' 하며 내가 요구한 연봉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연봉 250% 인상이 확정된 순간이다. 10년의 우울과 경력단절, 4년의 불면과 인고의 시간 후에 찾아온 상은 이상하게도 기쁨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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