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수학을 전공했나요?
뒷베란다 문을 여니 엄지손가락만한 하얀 애벌레들이 음식물 쓰레기통 윗면을 빈틈없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제 저녁만 해도 미쳐 버리지 못한 쓰레기 근처에 ‘깨'만 한 크기의 누런 번데기 서너 개가 보였을 뿐인데... 밤 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거기에 살까지 통통하게 올랐던 것이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았다. 꼼지락거리는 모양새를 한참 바라보다 하나씩 집어서 까만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벌레를 본 꿈' 벌레는 안 좋은 일, 고생하는 일을 뜻한다는 해몽을 내놓았다. 다시 검색했다.
'벌레를 잡는 꿈' 벌레를 본 건 안 좋지만 잡아서 버리는 꿈은 힘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해몽이다.
그럼 벌레를 주워 담다가 끝난 꿈은 뭐지?
벌레를 주워 담는 의도가 버리기 위함이니 이번에는 좀 나아지려나 한숨이 나왔다.
석 달 전 어느 토요일 오후 제안서 초고를 다듬던 중에 Y의 전화를 받았다. 모 도시의 수학박물관 기본설계 기획자가 필요하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지금 받는 월급의 2배, 재택근무, 일일 근무시간 5시간(이건 내가 정한 조건이다)이 조건이었다. 딱히 문제라면 6개월 계약에 4대 보험이 없는 프리랜서 신분이 된다는 것이다. 다니고 있는 회사와 동일한 조건에서 월급만 올랐으니 망설임 없이 퇴사를 결정했다. 그러나 회사 대표는 유급휴가로 처리할 테니 쉴 만큼 쉬고 오라고 했다.
육아를 핑계로 일을 그만둔 지 10년이 되던 해에 이 회사를 소개해준 이가 바로 대학원 동기인 Y였다.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는 누구나처럼 용기가 필요했고 회사가 원하는 일을 수행하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능력은 불면의 시간으로 지난 4년을 촘촘히 채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40여 년을 살아도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다니는 회사가 전시업체다 보니 자연히 내게 주어진 업무는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박물관, 전시관의 제안서를 기획하는 일이 되었다. 최근 들어 내가 기획하거나 참여한 크고 작은 제안서의 승률이 높아졌다. 제안서가 심사위원들의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당선되면 회사는 이 제안서를 기반으로 전시관의 기본설계, 실시설계를 거쳐 전시물 제작, 설치까지 도맡는 기회를 차지한다. 회사에 일이 많아지면 기본 또는 실시설계의 기획자로 나의 업무는 늘어난다. 그럼에도 내가 일일 근무시간 5시간을 당당하게 고수하며 나름 워라벨을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적은 월급 덕분이다. Y의 제안과 별개로 유급휴가로 나를 기다려주겠다는 대표의 의지에 어깨가 조금, 아주 조금 으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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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개관을 앞둔 5층 규모의 수학박물관은 도서관을 비롯하여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수학놀이관, 초중고생을 위한 역사지혜관, 교과체험관, 진로체험관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기본설계 업무는 중고등학교 수학선생님과 장학사로 이루어진 TF팀이 선 작업한 기본계획안을 토대로 4개의 체험관에 설치될 100여 개의 전시 아이템의 구체화된 세부 연출을 제안하고 TF팀, 설계팀과의 협의를 통해 기본설계안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역사지혜관의 첫 번째 전시 아이템인 '린드 파피루스'의 경우 기본계획안에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술되어 있다.
'린드 파피루스를 전시하고 파피루스 속 단위 분수 표기법을 찾아 문제를 풀어본다'
인류 최초의 이집트 수학책인 린드 파피루스는 길이 5.5m 폭 0.33m의 두루마리로 된 가로로 긴 대형 전시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학사랑(수학교재, 교구 개발 판매업체)에서 만든 수학박물관에 전시된 복제품이 유일하다. 이 수학책에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문자로 쓰인 87개의 수학 문제와 풀이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아직 수학 개념이 정립되기 전이라 현재 교과과정에서 다루는 분수, 일차방정식, 거듭 제곱수, 피타고라스 삼각형 등의 문제들을 오늘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역사지혜관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기획의도에 따라 우리는 린드 파피루스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옥스퍼드 대학 박물관 사이트에서 실제 크기를 알아내어 아직 준공 전인 건축도면 속 공간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배치가 될지 고민한다. 그다음은 린드 파피루스에 쓰인 이집트 문자를 해독하는 방법과 87개로 이루어진 수학 문제들의 배열 속에서 교과과정과 연계된 문제들의 위치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의 계산방식을 소개하고 오늘날의 문제풀이 방법과 비교하는 2분 분량의 영상 시나리오와 영상이 구현되는 연출 매체 방식(터치 모니터, 빔프로젝터, 키오스크 등)과 디자인을 제안한다. 이때 TF팀의 시각적 이해를 돕기 위해 구글과 핀터레스트를 샅샅이 검색해서 찾은 전 세계의 수학 관련 박물관과 비상설 기획전시에서 보다 쉽고 흥미로운 연출 사례와 이미지들을 추려 적용 가능한 방안도 함께 제시한다.
문제는 전공자라면 당연히 금방 알아차렸을 테지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형문자와 린드 파피루스의 문자는 그 외형이 너무도 달랐다. 여러 차례 검색을 통해 알아낸 바로 린드 파피루스에 쓰인 문자는 일반적인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hieroglyphic)가 아닌 신관 문자(hieatic)로 쓰였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상황과 계급에 따라 4가지 문자를 썼다고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형문자는 해독해 놓은 문서들이 많았지만 신관 문자는 그렇지 않았다. 세계 여러 대학의 연구논문들을 뒤져가며 신관 문자를 상형문자로 해독해놓은 자료를 겨우 확보한 후 인터넷상 떠도는 린드 파피루스 수학 문제들의 단편적인 이미지들과 비교하며 파피루스 내에서 정확한 문제의 위치와 내용을 파악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게 소요되었다. 이런 식으로 100여 개의 아이템들은 저마다의 복병을 품고 있었으니 6개월의 계약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넉넉지 않았다.
우리의 업무분장은 동등하게 시작되었다. 나는 역사지혜관과 교과체험관을, Y는 수학놀이관과 진로체험관을 담당하되 수시로 협의하며 진행하기로 했다. 일일 근무시간 5시간을 지키며 진로체험관의 40여 개 전시 아이템에 대한 연출 카드를 만들고 2주 후 Y에게 보냈다.
연출을 안 해보셨군요. 이런 식이면 TF팀에게 신뢰를 줄 수 없어요!
Y의 첫마디에 나의 기세는 맥없이 무너졌다. TF팀은 수학의 전 교과과정을 꿰고 있었으므로 기본계획안에는 그들이 교육과정에서 시도해 볼 수 없는 또는 시도하고픈 체험방법만 나열해 놓았다. 나는 그것만으로 아이템마다 적용된 수학 개념을 추려내고 관련 연출 사례를 찾아내어 체험내용을 보완하거나 보다 재밌을만한 연출 방법들을 작성했다. 그러나 TF팀이 제시한 체험방법을 이해할 수 없거나 연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아이템은 '추가 설명 필요'라는 표시를 하고 빈칸으로 돌려보냈다. 설명이 부족해 이해가 어려우니 당연히 박물관 TF팀에 요청하면 될 줄 알았던 것이다.
Y는 프리랜서 기획자는 질문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하루 뒤 내가 해결하지 못한 아이템들의 체험 방법뿐 아니라 TF팀이 제시한 그것보다 더 신박한 체험 안까지 추가로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거기에는 내가 지난 4년간 해왔던 제안서의 세부 연출안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제안서 전시연출에는 대략 두세 줄로 축약하여 포괄적인 개요만 기술하면 된다. 이와 달리 기본설계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세밀한 서술로 기승전결이 있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제안서는 간결하고 확정적 텍스트로 표현되어야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기본설계는 TF팀과 주기적인 회의로 연출안을 보완, 수정해나가는 협의형 텍스트를 구사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TF팀에 밀리지 않는 전문적 수준(이건 솔직히 불가능하다)도 보여야 했다. 자칭 수포자라는 Y는 수수께끼 같은 TF팀의 계획안을 이리저리 궁리하며 밤을 새웠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아이템들을 내가 해결하지 못하면 Y가 두 배 또는 세 배로 일할 것임을 그때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업무분장은 협의가 아닌 Y의 지시에 따르는 방향으로 재배치되었다.
1. 아이템별 학예 자료와 함께 작성한 아이템 카드를 Y에게 보낸다.
2. Y는 꼼꼼히 살펴보며 필요한 추가 사례나 보다 효율적이고 재밌는 체험 안을 구상해서 다시 보내준다.
3. 나는 Y가 보내준 구상안에 적합한 연출 사례를 찾고 체험 방법을 보완해서 작성한다.
서너 차례 피드백으로 아이템은 보다 시각화되고 체험은 체험 대상에 적합한 방식으로 단단해졌다. 역사와 교과 체험관이 이런 식으로 정리를 마칠 때쯤 Y는 이제 감 잡으셨네요 라는 말로 그간의 맘고생을 다독여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존감은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 9시에 시작된 작업은 밤 12시에 끝이 난다. 책상 위에는 인공지능, 산업 수학, 딥러닝 등의 수십 권의 책들이 색색의 포스트잇이 붙여진 채 쌓여있다. 마지막 남은 진로체험관의 아이템 카드를 위한 학예 자료들이다. 요즘 핫한 이슈라 관심은 있었지만 접근성이 쉬운 분야는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전시기획자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해당 분야의 이해도를 장착하고자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다행히 수학과 컴퓨터를 잘 아는 물리학과 교수인 남동생, 해당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친구들의 아들과 딸 등 있어 한결 맘이 놓였다.
수년간 워라벨을 만끽하며 만들어진 엉덩이 근육과 고3 아들을 위한 충실한 식단관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무엇보다 제일 안타까운 건 친환경을 실천하던 생활습관이 한순간에 없던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족과 지구를 지키는 일보다 우선이 된 수십 개의 아이템 연출 카드는 그야말로 밤사이 엄지손가락만 하게 통통히 살이 오른 애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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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모든 아이템 연출 카드를 완성하고 마지막 최종보고회 때 TF 팀은 우리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수학을 전공했냐고... 하하! 마침내 우리는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기쁨에 취해 우리도 모르게 나온 다음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손사래 치며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말하자 그들은 웃고 있던 표정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