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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Dec 20. 2022

신입은 알까?

몰라도 된다.

  아무리 미래가 두려워도 이건 아니지 싶다. 매달 실손보험으로 12 , 종신보험 25  도합 37 원이다. 10   대장에 문제가 생겨 일주일간 입원한 병력 때문에 종신보험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환급금이 없는 실손보험이라도 든든하게 들어놓자며 시작한 보험료가 해마다 갱신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10 원이 훌쩍 넘어 버렸다. 거기에  4월에  종신보험까지 매달 없는 (20 만기에 중도해지금이 제로에 가깝다.)이라 치기엔 이젠 너무 버거워졌다.  


  올해  연봉이 오르자  처음  일이 종신보험을  일이다. 아이들은  성인이  테고 우리 부부는  좋게 정착한 비싼 동네에서 살아내느라 하루살이 삶을 살고 있다. 어디선가 종신보험이 자식들에게 비과세 유산으로 물려줄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자 경제적 여유가 있는 동네 지인들은 30 원에서 50  이상을 매달  보험료로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종신보험의 주계약은 사망보험금인데  금액이 높을수록 수령자로 등록된 자녀들에게 돌아갈 보험금은 당연히 많아지고 여기에 특약을 넣으면 살아있는 동안 무슨 일이 생겨도 웬만한 입원비, 수술비, 진단비까지 든든하게 보장받을  있으니 현명한 부모라면 안들  없는 보험이다. 돈을 벌지 않을  그리고 좀처럼 돈이 모이지 않을  세상 부러운 사람들이 바로 자식의 미래까지 돈걱정 없도록 준비하는 나의 지인들이었다.  여전히 단돈 15  적금하는 것도 녹록지 않은 현실에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종신보험에  날은 정말 기뻤다. '나도 이제  아이들에게 남겨줄 돈이 있다!' 계좌에서 매달 빠져나가는 돈이 그렇게 든든하고 자랑스러울  없었다.  


  보험에 이처럼 삶을 의탁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사는 동안 혹시라도 큰 병에 걸려 병원비로 남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삶의 방향이 사는 쪽보다 그 반대편에 가까워서다. 물론 나이도 그쪽을 향해 달려가지만 살고 싶지 않은 의지가 나이보다 더 빨랐다. 언제 멈추어도 감사한 생이라 나 없이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밑천에 무게를 두었다. 솔직히 엄마를 잃은 아이들의 아픔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질 감정이니까. 아이들은 곧 자신의 삶을 살아갈 테니까.


  생각이 바뀐 건 순전히 카드값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발주처인 시청과 군청으로 제안서, 기본계획(안)을 발표하러 가야 하는 일이 빈빈해지자 입고 나갈 옷이 필요해졌다. 일을 그만두기 전 입었던 15년 된 정장들은 단추가 채워지지 않았고 작은 키를 보완하는 굽 높은 구두는 올라서자마자 휘청거렸다. 홈쇼핑, 백화점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정장, 코트, 가방, 구두 등을 하나씩 장만하다 보니 카드값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제일이 다가오자 푼푼이 모았던 통장들을 하나둘 해지하다 마침내 보험까지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이다.




  생계형 워킹맘이 되어버린 지 벌써 5년 차다. 육아와 남편과 시가가 세상의 전부였던 전업주부의 시간이 그리울 만큼 지금의 삶은 매일이 롤러코스터다. 주어지는 일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어 매번 새로운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고, 하나를 해내면 다음은 더 버거운 일거리가 주어진다. 주변은 온통 빨간펜을 든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제안을 하면 그들은 그 빨간펜으로 난도질을 하고 더 더 새로운 걸 찾으라고 쪼아댄다. 그나마 내 일을 도와주는 이는 결혼과 육아로 휴직 중인 30~40대 중간 관리자들이 아닌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신입들이다. 내가 반반한 옷과 가방을 사는 이유는 발주처에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이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 때문이다. 엄마인 나는 좀 부족하고 수수할수록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여주지만 사무실에서의 나는 발주처와 회의하는 나는 유능하고 멋진 모습일수록 신입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테니까. 내가 그랬듯이. (아직까진 그렇게 유능하지도 멋지지도 않다. 그래서 몸에 걸치는 장비에 돈을 쓴 것이다.)


  25년 전 인테리어 잡지사에 몸을 담았던 날들이 있었다. 기획부에 입사한 터라 신입인데도 새로운 잡지 창간 멤버로 바로 합류되었다. 오전에는 매일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신문과 잡지에서 새로운 이슈들을 카테고리별로 스크랩하고 오후에는 새로운 영화나 전시, 관련 사람들을 만나며 내 안에 무수한 새로움을 강제로 채워야 했다. 기획은 많이 알아야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보고 새로움에 익숙해져야 잘할 수 있다고 선임은 말했다. 그 당시 선임은 입사 8년 차 과장이었는데 짧은 커트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색을 가진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근처 호텔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취미가 있었고 점심식사 후에는 꼭 담배를 태우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찌 앤비 향수를 쏟아부었다. 그녀는 일을 하지 않았다. 회사 이사님과 종종 사라졌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미술관, 영화관에서 이른 퇴근을 했으며 나와 동반 입사한 동기들이 밤새워 만들어낸 잡지 샘플에 빨간 줄을 긋는 일이 다였다. 빨간펜이 지나간 자리가 무슨 의미인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9개월간 배운 거라곤 글쎄... 본인이 일에 열정적이지 않아서였을까 그녀 밑에서 일하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가한 커리어우먼의 낭만 외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 후로 만난 선임 혹은 교수님들은 막판까지 수정시키며 완벽한 기획서를 만드는데 혈안이 된 워커홀릭이자 우아함을 꾸밀 줄 아는 달인이었다. 그들의 일욕심 덕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을 그만둘 수 있었고 후회도 없다. 그럼에도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에 자리 잡힌 선임의 이미지는 8년 차 과장이 아닌 꾸밈의 달인이다. 나를 닦달하는 선임들이 대체로 싫었지만 우아하게 차려입은 그들이 좌중을 휘어잡으며 발표하는 모습은 연말시상식에서 연기대상을 받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매니저의 눈빛처럼 나에게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아무튼 이 코딱지만 한 회사에 입사한 신입들이 장비 빨로 치장한 나를 통해 조금이나마 일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종의 책임감이 생겨버린 것이다. 실은 신입들은 내 아들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내 아이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이 친구들이 존중받으며 하고 싶은 일들을 잘 해낼 수 있도록 보듬어 주고 싶었다. 나아가 아직은 먼 이야기겠지만 결혼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의 두려움으로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너무 애쓰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도 보태었다. 너무 애쓰다 보면 우울은 제 집인 줄 안다.


  삶은 참 사소한 데서 돌아선다. 옷을 사고 카드값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보니 어느새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 중요해졌다. 오늘에 집중하는 삶은 우울을 조금씩 잊게 만들고 얼어붙은 공감능력을 살려냈다. 내가 없는 세상에 아파할 아이들의 마음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미래에 가 있는 마음을 붙잡아 보험금을 반으로 줄였다.


  그나저나 신입들은 이런 내 맘을 알까?  (몰라도 된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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