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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롱지다 Aug 14. 2022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나. 아마도 그날은 제사 준비로 한창 바쁜 엄마의 딸그락 소리가 방문 너머로 쉼 없이 들려오고 있었을 것이다. 햇살이 따스한 계절이 돌아오면 겨우내 잠시 우리 집에 머물렀던 할머니가 시골집으로 내려가신다. 그 틈에 나는 주인 없는 깜깜한 방에 들어가 손바닥만 한 소반을 폈다. 꼬리한 옻칠 향으로 가득한 소반 위에 하얀 공책과 나무젓가락을 깎아 만든 펜(깃털 펜의 응용 버전), 파란색 잉크통을 가지런히 놓았다. 잉크에 나무젓가락 펜을 적셔 이제부터 소설을 써볼 테야... 첫 글자, 첫 문장을 호기롭게 지어내곤 했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첫 문장을 쓰는 건 감당키 어려운 일임을 알았는지 이내 구겨진 종이뭉치들만 방안을 굴러다녔다. 우연찮게 선생님을 주제로 한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던 게 시작이었다. 그 후로 피어난 '글을 쓰고 싶다'는 갈망은 생각보다 깊게 마음에 박혔던 모양이다. 소설이라 말하고 감정 쓰레기라 읽는 의식은 종종 마음이 한가한 어느 때고 진행되었다.


  얼마 전 수십 년간 차곡차곡 쌓인 일기들을 모두 태웠다.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모르고 몰라서 모를 거라서 다친 마음들을 쓸어 담은 이야기이다.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까발렸고 충분히 쓸모를 다한 글 뭉치다. 다시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 마지막 문장을 끝내자 더는 이런 방식으로는 쓰고 싶지 않아 졌다. 한마디로 진력이 난 것이다.


  서너 번의 낮과 그만큼의 밤을 보낸 뒤 한결 가뿐해진 마음으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웬걸... 도통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하루 이틀 뭐 그렇게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다. 어떻게든 써보려고 엄마, 나, 딸아이로 이어지는 대물림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 초반에 등장한 정신건강클리닉의 공간 묘사에 빠져 길을 잃었다. 밥 하는 걸 세상 무엇보다 싫어해서 그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쓰다 정신을 차렸다. 엄마처럼 수십 년의 인생사를 펼쳐야만 누군가는 이해할 거라는 착각을 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했던 방식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쓰던 글들을 굳은 결의로 삭제하고 지금까지의 방식을 리셋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방식의 그것을 알지 못하는 나는 망망대해에 표류한 심정으로 몇 주째 흐릿한 나날을 흘려보내고 있다.


  글은 나의 인생이다. 글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다.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던 방식의 글이어도 내가 쓴 글에서 치유받고 내가 그린 글에서 희망을 보았다. 단 한 글자도 시작할 수 없는 이 음울한 상황이 길어질수록 왜 쓸 수 없는지 물음은 자꾸만 늘어갔다. 이런 나의 마음에 유튜브 알고리즘은 야심한 시간을 틈타 '세바시 인생 질문'을 들이밀었다. 영상에서 만난 김헌 교수님은 다음 세 가지 질문으로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가?

-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생 목표에 답을 할 수 있다면 다른 방식의 글쓰기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

  이불을 박차고 노트북을 열었다. 세 가지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TMI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이제껏 이렇게 긴 글은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비처럼 글자들이 마구 쏟아졌다. 질문마다 답이 그럴듯하게 놓이면 한참 동안 문장과 문단의 행렬을 감상했다. 결국 인생 질문은 행복과 즐거움 그리고 책임을 사유하며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인생질문에 추리고 추린 나의 답이다.


  첫 번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의 답은 '외롭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이다. 그래서 그런가 내 인생의 반평생을 차지한 결혼과 육아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였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운가? 의 답은 '몰입'이다. 물론 몰입할 때는 즐겁다는 감각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감각도 느끼지 못한다. 그 시간이 끝나고서야 알게 된다. 나에게 시공간을 넘나드는 힘이 있다는 것을. 사람마다 몰입하는 주제와 지점이 다른 것처럼 나 역시도 몰입을 위한 특이점(Singularity)이 있다. 그것은 어쩌다 직업이 된 전시기획과 인생이라 일컫는 글 그리기다. 이 둘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데는 내 성격이 한몫을 한다. 나는 어떠한 색 조합이든 색이 있는 모든 곳에 쉽게 매료당한다. 궁금한 것을 잘 참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를 내식대로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또 산재된 사물과 생각들을 분류하고 정렬하는 작업을 좋아한다. 작업하는 과정도 좋아하지만 그 결과물이 시각적으로 감각될 때 편안함을 느낀다. 전시기획과 글 그리기는 주어진 주제 혹은 스스로 찾아낸 소재에 따라 먼 과거나 미래로 시공간이 확장되고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요소들(색, 호기심, 상상, 정렬)로 직조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 인사이트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둘 다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전시기획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일 뿐. 매번 그 이상의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늘 버겁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은 본업 외에 서툴러도 재밌는 취미가 꼭 있어야 일상의 균형이 맞는다고 한다. 취미생활은 잘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진 본업의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게 그 이유였다. 글을 그리는 동안 나는 누구의 지시 없이 세상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다.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일렁이는 불분명한 감정과 희뿌였던 세계가 청명한 실체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남들 앞에 서면 흐물거리는 소신과 가치관이 단단해지는 마법도 일어난다. 이런 연유로 글 그리기는 해야만 하는 일들에서 해방되는 '나의 해방 일지'였던 셈이다.


  세 번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의 답은 '밥'이다. 위의 두 질문이 온전히 나를 위한 거라면 세 번째 질문은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가리킨다. 김헌 교수님은 우리의 삶이 1번과 2번의 인생 목표만 지향한다면 무기력이 친구처럼 드나들 것이며 3번만 있다면 우울이 생을 덮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반드시 1번과 2번 그리고 3번의 순서로 인생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결혼과 육아는 3번 질문만으로도 넘치는 세계이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사투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 누가 1번과 2번 질문에 답을 하겠다고 홀연히 일어날 수 있을까? 육아를 핑계로 일을 그만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우울감과 불면의 밤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익숙해질 때까지도 우울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신경안정제나 수면제의 도움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심리적으로 조그맣게 숨 쉴 틈이 생긴 날) 잉크에 나무젓가락 펜을 적셔 '글을 써볼 테야'하는 각오를 다졌던 작은 방 그보다도 더 작은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다시 나의 글은 시작되었고 더 이상 약은 필요치 않았다.


*

  질문의 답과 그 이유를 적어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글쓰기 인생도 사춘기가 있나?"


  글을 쓰고 싶은 이유가 이렇게나 충분한데도 쓸 수 없는 상황은 사춘기에 찾아오는 우울감 혹은 무력감과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졌다. (물론 내 나이를 생각하면 갱년기가 가까울 테지만 글쓰기는 고작해야 10년 남짓이니 사춘기가 맞을 테다.) 어떤 글을 쓴다 해도 이미 세상에는 그 글이 존재하고 있다. 수십 년을 돌아 알게 된 마음의 이름들도 이미 철학, 심리, 정신의학 분야에서 전문용어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고 심지어 어느 정도 매뉴얼화된 솔루션도 있다. 이러니 보잘것없는 내 글을 굳이 세상에 보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말 사춘기가 맞구나 확신이 들었다. 여전히 다른 방식의 글쓰기가 어떤 건지는 모른다. 다만 어떻게 나아가면 되는지는 알 것 같다. 수많은 고민과 배움이 채워져야만 빠져나올 수 있는 사춘기처럼 어떻게든 계속 끄적거리고 다시 작가들의 글을 겸손하게 탐독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렇게 돌고 돌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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