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니 에르노, 샌드라 거스
고단한 밤, 어느새 차가워진 공기를 가로질러 마침내 집 앞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무심결에 광고와 뉴스가 번갈아 나오는 LED 패널에 눈이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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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마다 내놓은 실시간 뉴스들이 주르륵 등장하다 갑자기 속보로 뜬 헤드카피를 본 순간 온몸에 피가 쫙 돈 것처럼 눈이 번쩍 떠졌다. 혹시나 해서 핸드폰으로 검색하니 내가 애정 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가 맞았다.
아니 에르노를 알게 된 건 2년 전 트레바리의 한 에세이 모임에서였다. 4개월 여정의 에세이 모임은 멤버들이 제출한 에세이를 합평하는 시간과 모임 파트너가 선정한 책을 다 같이 이야기하는 북 토크 시간으로 진행된다. 여러 개의 아기자기한 이름을 가진 에세이 모임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 나의 경우 파트너가 선정한 첫 번째 책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때 원픽이었던 책이 바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었다. 망설임 없이 모임을 선택하고 결재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책이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소설은 작가의 이력, 작품 해설,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도를 장착한 후 첫 장을 시작하는 이를테면 나만의 책 읽기 의식을 건너뛰게 한 참으로 이례적인 작품이었다.
3주 후 에세이 모임에서 북 토크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멤버들은 불륜에 불쾌감을 보였고, 삼류 연애소설과 다름없다고 했다. 호의적인 의견도 간혹 있었는데 작가의 범상치 않은 이력을 고려할 때 고차원적인 사상이 녹아있는 작품이라 말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아했다. 또 작가니까 사랑의 대상이 아마도 사람이 아닌 영감이 아닐까...라는 인상적인 의견도 있었다. 자유연애에 관대한 프랑스에서도 책이 출간될 당시 이보다 더한 혹평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다 작가가 유명대학의 고명한 교수라는 게 밝혀지자 비평가들과 언론의 평가는 180도 달라졌다. 아는 게 없어 웬만하면 의견을 내지 않던 나도 그날만은 작가의 딸이라도 된 양 하나씩 반박하며 이 책이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지 모르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솔직히 왜 그렇게 좋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말하면서도 감정에만 호소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어쨌든 갱년기 아줌마는 말릴 수 없으니 멤버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로 나를 진정시켰다. 그날 나의 에세이 소재는 단순한 열정과 정반대의 결을 가진 '이혼 연습'이었다.
내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불륜과 이혼이 넘쳐난다. 어떤 연구에서 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이 유한하다고 발표한 이후 사람들은 사랑의 유한성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듯 보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아서 결혼 초 '남편이 바람나면 어쩌지?’ 하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기도 했다. 왜 그때는 내가 바람이 날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안 했을까? 하하!
남편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유혹한 사람이다. 20여 년 간 그와 살면서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그의 유혹에 넘어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혼 후의 삶을 상상으로 그리면서도 글 어딘가에 남편의 흔적을 아무렇게나 펼쳐놓았다. 나름 격동의 시기를 넘은 지금도 앞 날은 알 수 없으니까… 우리가 어느 날 어떤 이유로 헤어진 대도 나는 결코 남편이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 신기하게도 그 이유를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사랑이 유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난날 나에게 사랑의 열병을 안겨준 남편이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새삼 뒤돌아볼 수 있었다.
소설은 한 남자를 기다리며 오로지 내 안에서 피어나는 순수한 사랑의 모양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선을 집중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된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책으로 답을 하고 싶다. 사람마다 해석은 다르겠지만, 나는 에르노가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의 주체는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느꼈다. (롤랑 바르트보다 쉽게, 에리히 프롬보다 감성적으로 말이다.) 남편을 사랑하는 일은 긴 시간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나 자신, 그로부터 받았던 따뜻한 배려와 이해로 행복한 나 자신을 사랑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모습이 세월의 역풍을 맞아도 그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가 무심하거나 심지어 나를 떠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어 쉽게 변질되거나 유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생의 반평생을 살아도 여전히 사랑의 실체를 정의하는 이런 사랑이야기가 나는 좋다.
최근 샌드라 거스의 '묘사의 힘'을 읽었다. 이제는 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아름답고 순수한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간 글을 쓰면서도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불투명한 베일에 갇힌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은 단비처럼 내려와 문장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적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아는 만큼 글을 쓰고 그리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단순한 열정'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 역시 한 남자, 그리고 글을 그리는 일에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그런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오늘도 돈을 벌고 마음을 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