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집중의 단련일기 2호
새해가 되면 새로운 다짐을 하고 그러면 어느새 새로운 목표를 위한 새로운 소비를 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독서’를 꾸준히 하자며 다짐하더니 어느 순간 노트를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만년필까지 사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어느 유튜버의 필사 영상에서 본 은은한 색의 마커펜이 사고 싶었지만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길 걸 생각하며 잠시 참았다.
독서를 한다더니 필사를 하는 이유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대신 대답해줬음 좋겠다. 아마도 독서 카테고리의 영상을 한두 개 본 이유가 나를 필사의 세계로 이끌었을 거다. 몰스킨은 만년필로 쓰면 종이 뒷장에 비친다고 하여 잉크가 비치지 않는 로디아를 선택했다. 노트 한 권에 이만 원을 투자한다는 건 평소 나답지 않은 선택임은 분명하지만, 나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는 것에 일종의 쾌감도 있었다. 새해 다짐이라는 게 지긋지긋한 나의 패턴에서 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래그래 잘 샀어 다독이며 빳빳한 노트를 펴서 미색의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렌지색 가름끈을 한 번 쓰다듬고 괜히 턱을 괴어 본다. ‘뭐부터 쓰지?’
처음 첫 장은 항상 어렵다. 어느 노트이든지 긴장하고 만다. 게다가 생애 첫 필사를 앞두고 나와 함께할 첫 책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동안 노트는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며칠 지나고 선택한 책이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라는 에세이다. 김연수 소설가가 ‘나만 좋아했으면, 싶은 사람이어서’라는 추천사에 궁금해서 안 살 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에 주문한 책이 저녁에 도착했다.
책을 정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아침을 필사로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 한 꼭지를 읽고 맘에 드는 부분을 골라 옮겨 적었다. 가장 좋은 부분을 고르는 것도 재밌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좋은 노트에 좋아하는 펜으로 차분하게 쓰고 있으니 나와 내 시간이 소중하게 다뤄지는 기분이다. 쓰다 보면 어떤 문장은 새롭게 읽힌다. 이런 문장이 이 사이에 있었나? 싶은 것도 발견한다. 속독하면서 지나친 문장도 쓰는 동안 정독한다. 글쓴이(옮긴 이도 포함해서)가 고민했을 한 문장, 한 단어, 그 사이의 조사를 나도 함께 곱씹어 본다. 기대 이상으로 필사의 과정은 재미있었다.
다만 그렇게 필사를 하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려 오늘의 할 일을 제대로 못 한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필사를 시작하신 분이 필사하려면 좋은 노트와 펜, 그리고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필사하는 시간에 조정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일찍 일어나거나 필사를 다른 시간으로 미루거나. 일찍 일어나는 건 자신이 없어서 후자를 택했다. 할 일을 모두 마친 밤에 책과 노트를 폈더니 늦은 시간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 손가락 까딱하기도 귀찮았다. 역시 작심삼일인 건가. 필사는 잠시 멈춰졌다. 올리버가 걷는 습지 주변의 아름다움을 글로 따라가는 즐거움도 중단되었다.
이대로 새해의 시도가 흐지부지되는 게 아쉬워 기상 시간을 한 시간 당겨보았지만, 얻은 건 필사하는 시간이 아니라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을 잘 수 있는 참을성(?)이었다. 요즘 혼자 하기 힘든 일은 주변에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서 함께 해보려고 한다. 코로나로 온라인 모임이 잦아 지면서 사람들과 오히려 모이기 쉬워진 측면이 있다. 물론 만났을 때만큼 온전한 소통은 아직 어렵지만. 어쩌다 보니 [단련일기] 친구들과 목표로 하는 기상 시간이 맞아 며칠 전부터 아침 요가 인증 온라인 모임을 시작했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요가로 몸을 풀고 나니 필사할 짬이 생겼다. 딱 삼십 분. 지금까지 노트에 일곱 페이지 정도 채웠다. 또박또박 쓴 글씨를 보면 바르게 산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