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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피소드] 01. 드디어 내 이상형을 찾았어

남편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

by 알파카

"드디어 내 이상형을 찾은 것 같아."


산책 중 아내가 불쑥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다음 말에 누구 이름이 오느냐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 이름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했다. 외모는 어찌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대화를 많이 하면서, 본의 아니게 아내가 기대하는 남편상-예를 들어 다정다감한 남편, 소통과 교감을 해주는 남편과 같은-을 어느 정도 채워줬던 게 아닐까? 내심 기대를 해보았다. 억측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류선재가 그동안 내가 찾던 이상형이었어."


류선재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선재 업고 튀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란다. 안 봐도 비디오다. 분명 키 크고 잘 생겼을 것이다. 왜 그 사람이 이상형이냐고 묻지 않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내는 왜 그 사람이 자신의 이상형인지 차근차근히 말하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인물. 하물며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그로부터 질투를 느끼는 것이 가당할까.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내적 패배감을 느꼈던 것은 왜일까. 대인배처럼 헛헛한 웃음으로 넘기긴 했다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밤 산책 중이라 다행이었다. 찹찹한 공기는 착잡한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르도록 했다. 하지만 류선재 얘기를 하면서 행복하던 아내의 표정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최근에 그렇게 해맑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아내가 좋은 소식을 물고 왔다. -내 기준으로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선재 업고 튀어'의 선재네 집이 수원 행궁동에 위치했단다. 곧 그곳으로 가게 될 것 같다.


선재네 집에 방문했다. 두 번이나 갔다. 밤에 한 번, 낮에 한 번. 밤에도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낮에는 더욱 많았다.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긴 줄을 서야 할 정도였다. 한국은 그렇다 쳐도, 동아시아와 남미에서도 류선재가 이상형인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제법 오래 줄을 선 후에야 아내의 사진을 찍어 줄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회사 동료로부터 관련 정보를 얻었다. 즉석 사진관 브랜드 중 하나인 포토이즘에서 행사를 하는데, 화면에 류선재가 나와서 마치 같이 찍은 것처럼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류선재와 손가락 하트를 하고 있었다. 감쪽같았다.


차라리 그 정보를 듣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분명 좋아할 것이다. 해맑게 웃으며 사진을 찍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난 포토부스 밖에서 시간이 다 되길 기다리고 있겠지. 멀뚱멀뚱히. 그래도 아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놓을 텐데, 오고 가며 그 꼴을 어떻게 보느냔 말이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의 맘 한 구석이 시릴 것이다.


그렇다고 얘기를 하지 말자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내가 참 행복해 할 텐데. 누가 나에게 아내 선물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것을 주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날 이후 행궁동에 산책을 하러 간 어느 날. 멀찍이 포토이즘 부스가 보였다. 잠시 고민을 했다. 아내가 웃음 짓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난 사내대장부다 사내대장부다.' 실상 소인배지만 대장부라고 자기 암시를 했다. 그리고 "옜다"하고 말했다.


"지금 포토이즘에서 행사를 하는데, 선재와 같이 찍은 것처럼 나와. 자기 한 번 찍어볼래?"


아내의 반응은 의외로 미온적이었다.


"음...... 아니 됐어."


'어, 이게 아닌데, 큰맘 먹고 말한 건데.' 하지만 왜냐고 묻지 않았다. 류선재를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싶다는 등 이런 소리를 들을까 봐 심히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음,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난 어쨌든 아내에게 기회를 주었고 아내는 그것을 거절했다. 할 만큼 했으니 스스로 도의적인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짓고 마음속의 의사봉을 땅땅땅 쳤다. 아내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다른 화젯거리로 이야기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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