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을 세울 것인가 갈등을 피할 것인가
2024년 7월. 지긋지긋한 장마다. 과거에도 이런 날씨가 있었나 싶다. 동남아에 살면서 우기철을 몇 해 경험해 봤지만 이제는 한국도 그에 못지않다. 고 황순원 작가님이 요즘 시대에 나셨더라면 지금의 '소나기'는 없었을 것이다.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해 원두막으로 달아났지만, 국지성 호우로 인한 피해로 어떠한 봉변을 당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집에 있을 땐 대기의 꿉꿉함만 견디면 되지만, 아침저녁 출퇴근 길은 정말 고역이다. 아무리 조심하여도 고여있는 물 웅덩이와 좌우에서 들이치는 빗줄기로 바지 밑단과 신발, 양말이 금세 젖기 마련이다. 그 축축함과 찜찜함을 고스란히 입고 업무에 임한다. 안 그래도 일하기 싫은데, 일하기 싫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이런 사정을 마냥 두고 볼 아내가 아니지. 하소연을 하니 즉각 조치를 취해 주었다. 까다로운 리뷰와 제품의 검수 과정을 거쳐 튼튼한 검은색 장화를 마련해 주었다. 100년은 족히 신을 만하다.
역시 사람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경험해야 한다. 이 신문물 덕분에 어떠한 빗줄기에도 나의 양말과 바지 밑단은 온전하였다. 또한 어릴 적 사방치기 하듯 뭍이 드러 곳을 찾아 껑충 뛸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물 웅덩이를 반긴다. 다른 사람들이 피해 가는 곳을 무심히 밟고 갈 때의 짜릿함이 있다. 내 앞을 막을 자 누구랴. 거침이 없다. 마치 손열음 님의 연주 같다.
며칠 후 집에 작고 귀여운 것들이 있었다. 아내가 주문한 것이었는데, 뭐냐고 물어보니 지비츠란다. 배지? 단추? 모양의 액세서리인데, 신발에 달아 꾸미는 용도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이 달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형형색색의 지비츠들은 과연 사람들이 좋아할 만큼 귀엽고 예뻤다.
아, 근데 내 장화에 다는 것은 아니지.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 꼴이다. 그런 것들은 젊은 친구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다. 나 같은 40대 중년 남성이 할 만한 것은 아니다. 하트, 보석, 꽃, 곰돌이 모양의 장식을 주렁주렁 매단 채 회사에 가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반면 아내는 속도 모르고 다양한 지비츠들을 이리도 꽂아보고 저리도 꽂아보면서 최고의 조합을 찾고 있다. 행복해 보인다. 이런 그녀 앞에서 '나 이거 못하겠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잠깐 고민을 했다.
'일단 신고 가보자. 사람들이 눈치 못 챌 수도 있다.'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기본적으로 장화 신은 남자가 거의 없었다. 지비츠들은 '나 여기 있어요!'라고 정강이 부근에서 합창을 하는 듯했다.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 없다. 내가 몇 사람이나 보았다. 고개는 정면을 응시하지만 가자미 눈으로 내 장화를 훔쳐보는 것을.
나 같은 내향인(I)은 누가 자기를 이상하게 본다고 생각하면 정상적인 행동이 안 나온다. 그러한 시선은 나의 행동을 엉거주춤하게 만들고, 그 엉거주춤한 행동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이목을 끌게 만든다. 실제로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쳐다보지 않고 있음에도 내향인은 그렇다고 믿는다.-이런 부끄러움의 올가미는 내향인의 숙명과도 같아서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그러고는 혼자 정신과 육체가 급속도로 피곤해져서는 무슨 일에든 금방 지치고 만다.
'자기야, 나 지비츠 안 달래. 쑥스럽고 창피해'라고 얘기를 꺼내볼까 생각했다. 그러면 왜 안 다냐니, 뭐가 창피하냐느니, 사람들의 시선을 왜 상관하냐느니, 이런 아내의 질문들에 대해 지혜롭게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틀렸다. 나의 말주변 없음을 스스로 답답해하다가 감정적으로 대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가 나왔다.
불도저처럼 '아, 몰라 됐고. 나 즈비치 안 달 거야'라고 밀어붙이면 궁극적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태도를 견지할 생각이라면, 정말, 정말, 정말이지 대단한 각오를 하고 말해야 한다. 자문해 봤다. 아내에게 그렇게 말 할 용기가 있는가? 입만 아프다.
이래나 저래나 지비츠를 달지 않겠다고 말하는 순간, 아내와의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아내와의 갈등은 곧 의식주 문제다. 입는 옷, 먹는 음식, 생활하는 집, 어느 것 하나 아내와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부끄러움을 벗어나려는 행위는 생활과 연관 있으나 의식주는 생존의 문제다.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려다 생존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 소탐대실이라는 비유가 딱 그거다.
추가로 지비츠를 달지 않겠다고 했을 때 아내의 표정을 생각해 보았다. 아내는 나와 같이 지비츠를 단 장화를 신고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을 상상했으리라. 이를 위해 수백 개의 지비츠 모양과 색깔을 심사숙고했을 것이며, 최저가까지 알아보려니 더욱 고생했을 것이다. 괜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하고 다니자. 그리고 기왕 했으니 당당하게 걷자. 런웨이를 걷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