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같은 아내의 한마디
백점 만점에 95점 주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위치 말이다. 마을이 다른 곳보다 조용하고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하여 서울까지의 접근성이 좋다. 무엇보다 주변에 걸을만한 곳이 많다. 기흥 호수공원, 광교 호수공원, 동탄 호수공원, 수원 화성 등 차로 30분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매주 산책 장소 고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설날이다. 오늘은 어디를 산책할까. 작년 추석, 수원 화성에 방문했다가 화성행궁 입장료를 받지 않아 기꺼이 행궁 내부까지 둘러봤던 기억이 났다. 설에도 무료인가? 검색을 해봤다. 무료란다. 고민할 것도 없이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연까지 챙겼다. 행궁 앞 광장에서 연을 날릴 심산이었다. 날씨와 바람이 좋으니 제법 높이 날 것이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으로 얼레가 빠르게 돌아갔다. 잠깐 놔두니 삽시간에 하늘 중턱까지 치솟는다.
'그래, 이 기분에 연을 날리지. 높이 날린다고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니 마음껏 올려보자.'
욕심이 과했을까?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탓에 다른 연줄과 열십자로 엉켰다. 고수들은 실의 긴장과 바람을 이용해 연을 이동시키지만, 초짜인 나는 그저 '어, 어, 어' 할 뿐이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힘차게 얼레를 감았다. 아, 그냥 가만히 있을 걸. 실의 마찰로 이내 '툭' 끊어져버렸다.
나의 독수리 연은 진짜 독수리마냥 '부웅' 하고 날아갔다. 한용운 선생님의 '님의 침묵'이 떠올랐다.
연은 한동안 떠다녔다. 5분여를 제 맘대로 날다 제법 멀리 있는 4층 교회건물 뒤편으로 떨어졌다. 잠시 좌절했지만 심폐소생술-끊어진 실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수백 미터 떨어진 그곳으로 향했다. '교회가 박공지붕-삼각형 모양-이라 분명 주변에 떨어져 있을 거야.' 머릿속으로 희망회로를 돌리며 건물을 두 바퀴나 돌았다. 헛수고였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상심이 컸다. 연을 날릴 때 연은 곧 나였다. 연이 떠오르면 내가 떠올랐고, 날고 있으면 내가 날았다. 하늘을 날게 해 준 그 연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상실감이 밀려왔다.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나를 보고 아내가 툭 한 마디를 했다.
"연은 그때만큼은 자유로웠을 거야."
맞아. 생각해 보니 그렇네. 늘 얽매어 있던 연은 줄이 끊어지면서 더 높이, 더 자유롭게 날았겠구나. 꿈보다 해몽인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새장 안에 있던 새를 자유롭게 풀어준 느낌이랄까. 문득 아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사람, 혹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그랬다. 어떤 일로 혼자 본가에 방문하는 길. 순차적으로 하남, 구리, 남양주를 지났다. 과거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해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도로 좌우에 즐비한 고층 건물과 타워크레인의 높이만큼 부동산 가격도 우뚝 솟았을 게다. '와, 여기가 이렇게 변했어'를 남발하며 운전을 했다.
반면 행정구역상 가평군인 대성리와 청평에 들어서니 갑자기 조용해진다. 박진감 있는 스포츠 중계를 보고 있는데 누가 갑자기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 같다. 익숙한 풍경, 노상 그대로인 건물과 도로...... 새로 생긴 베이커리나 커피전문점만이 간간이 눈에 뜨일 뿐이다.
어떻게 우리 가평만 이럴 수 있지? 이해는 간다. 상수원보호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평군은 서울과 수도권의 수질보호 목적으로 개발 규제라는 손해를 감수하고 있는 반면, 수도권은 적극적인 개발에 따른 부동산 상승, 주거 환경 개선 등의 수혜를 온전히 입고 있다. 이거 남 좋은 일만 하고 잘되는 꼴만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니, 나의 감정은 괴리감을 넘어 다소 억한 심정으로 변했다.
부모님 댁에 다녀와서 아내에게 이러한 심정을 토로했다. 내가 살았던 고향이 여전히 그대로더라. 주민들은 개발에 따른 혜택을 못 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더라. 그러자 그녀가 한마디를 툭 했다.
"변하지 않으니까 더 가치 있는 거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잘 보존된 자연환경이나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한옥마을, 구도심의 골목길을 찾는 것도 변하지 않는 그 가치 때문이겠지. 어떠한 것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나는 물질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고 평가했구나. 그렇다면 여전히 나의 고향이 지금 모습을 더 오래 간직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일들. 그러니깐 아내가 툭 던졌는데 그것이 나에게 굉장한 깨달음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이 사람, 사실은 천재인데 나에게 그냥 맞춰주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그 편한 엑셀을 놔두고 전자계산기로 일일이 금액을 더해가며, 가계부를 손수 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 생각을 다시 접는다.
가끔 좀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