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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생일] 편지 02_원인제공

당신의 감정을 이해하기로 노력하기로 한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by 알파카


자기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지. '내가 더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하는데......'라고 말이야. 특히 화를 덜 내야 한다고 스스로 계속 되뇌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당신은 이미, 충분히 좋은 아내야.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깐. 그리고 사실 자기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은 나인걸.


싱크대 하수구 청소나 전복 손질하는 데 사용하는 칫솔로 내가 양치질을 했을 때.

자기가 청소하면서 바닥에 한데 모아놓은 먼지들을 밟고 지나갔을 때.

같이 콘센트 교체를 하던 중 내가 싱크대 위 물기 있는 것을 확인도 안 한 채 전기 제품을 올려놓았을 때.


위 일들이 모두 지난 1~2주 간에 벌어진 사건이었지. 아마 생각하려면 더 쓸 수 있을 거야. 특히 싱크대 위 물이 고여있는 곳에 전기 제품을 올려놓고 나서는 속으로 바로 '아차' 싶었어. 자기의 '분노 유발 버튼'을 눌렀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웬걸. 그냥 넘어가더라고. 그때는 용케 넘아갔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억누르고 있는 모습이었어.


결국엔 일이 터지고야 말았지. 화장실 보수를 위해 백시멘트를 겐 세숫대야를 씻지도 않은 채, 내가 그대로 물을 담아 세수를 했지. 나의 위생, 보건, 안전 개념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자기는, 드디어(?) 그날 폭발했고 나도 자기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기에 대꾸하지 않고 있었어.


그런데 일의 잘잘못을 떠나 마치 랩을 하듯 나에게 계속 뭐라고 하니 나도 속상하더라고. 백시멘트 물로 세수를 한 사람은 바로 난데 말이야. 조금 참고 있다가 더 이상 랩이 지속되면 나도 맞대응을 하려는데, 생각해 보니 자기가 이해는 되더라고. 자기는 나를 바로 자기 자신으로 생각했던 게지. 그래서 더 감정이 이입되었고 내가 하는 잘못들이 더욱 크게 다가왔던 거야. 나를 남이라 생각했다면 그렇게 화를 냈겠어? 그리고 날마다 이 일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계속 참을 수만 있겠어. 자기도 사람인데. 그래서 그날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지. 좀 생각을 하면서 살게.


반대로 난 어떻게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지. 바뀌어야 할 부분이 한도 끝도 없더라고. 게 중 하나를 정했어.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기.'


자기가 어떤 사건에 대해서 얘기하고 그에 대한 감정을 토해낼 때, 목석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감해 달라고 지속 요구하고 있잖아? 그래서 올해는 그렇게 바뀌어 보려 해. 원체 무심한 성격이라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최대한 노력해 볼게.


내가 조금씩 변화될 때마다 격려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야. 오늘은 이만 쓸게.


2025년 1월 7일

당신의 감정을 이해하기로 노력하기로 한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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