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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생일] 편지 01_질보다 양

3년 연속 무심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by 알파카


자기가 넌지시 "준비는 잘 돼 가고 있어?"라고 말했을 때 잠깐 눈빛이 흔들렸어. 뭐를 말하는지 몰랐었거든. 만약 내가 '뭐를?'이라고 되물었을 때 심삼치 않은 상황이 올거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서 재빨리 상황파악을 하려 했지. 보통은 눈치가 더럽게도 없는 나지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초능력이 생기잖아. 자기가 말하는 '준비'란 바로 본인의 생일 준비를 말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지. 이러한 모든 과정이 단 1초 만에 이뤄졌고 난 자연스럽게 대꾸를 했지. 나름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눈치챘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자기는 생일 준비에 대한 포문을 열었고, 난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지. 한편으론 기다리고 있었어.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편지를 주지 못해 얻게 된 ‘무심한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올해는 어떻게든 벗어버리고 싶었거든.


'어떻게 써야, 얼마나 써야 자기가 만족스러워할까?' 고민을 해봤는데 특별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어. 그래서 일단은 최대한 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긴 분량의 글을 쓰자고만 생각했었지. 그런데 자기도 알잖아. 편지를 쓴다는 게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사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몇 문장 끄적이긴 했었는데, 천편일률적인 내용 탓에 진도가 쉽게 나아가지 못했고 결국 다 쓰지를 못했어. '미안하고 고마워. 생일 축하해'를 그냥 여러 문장으로 풀어놓은 것뿐이었지. 그래서 이번엔 작전을 변경해 볼까 해.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기로.


자기 생일이 40일 정도 남았으니 하루에 하나, 못해도 이틀에 하나만 쓰더라도 20개는 쓸 수 있을 거야. 그럼 일단 공은 많이 들였구나 평가할 것이니, 내용면에서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어쨌든 합격점을 받을 수 있겠지?


꾀를 쓴다고 삐뚤게 바라보지는 말아 줘. 어떻게 하면 자기가 좋아할까, 자기로부터 인정받을까, 무심한 남편이라는 꼬리표를 올해는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 어니깐. 그리고 약속해. 한 문장을 쓰더라도 휘뚜루마뚜루 쓰지는 않을게.


이 계획을 자기 생일날까지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많이 의심스러워. 며칠 후 이 글은 소장용 폴더에만 남겨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은 시작해 보려고. 흐지부지 되더라도, 지레 겁먹고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어? 올해는 뭔가 특별한 것을 주고 싶은데 이 정도 노력도 없으면 안 되잖아. 마음 단단히 먹고 도전해 볼게.


벌써부터 내일 무슨 내용을 써야 할지 걱정이다. 그래도 자기가 행복할 모습을 상상하니 힘이 난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게.


2025년 1월 6일 월요일

3년 연속 무심한 남편이라고 듣고 싶지 않은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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