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세 가지 행복
냉혈한인 나와는 반대로 아내는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상대방의 감정을 쉽게 이해하고 동의한다. 반대로 본인의 감정도 곧잘 표현한다. 만족스러울 때, 인정받을 때, 침울할 때, 무서울 때, 격노할 때, 무시당할 때 등 거의 모든 감정을 공유한다. 적절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상대방과 교감하는 것은, 나처럼 감정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는 참 부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라지만 아내의 감정의 홍수 속에서 '아, 행복해'라는 말을 놓칠 순 없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말했는지, 행복의 동인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파악해보려 한다. 경험상 아래 세 가지 경우에 행복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맛있는 거 먹을 때
아내는 나와 연애할 때 말라도 너무 말랐었다. 당신의 모습은 마치 해골 같았다고 몇 차례 얘기한 적도 있다. 그런 아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욕망과 그에 대한 만족감을 자주 표출했다. 맛있는 음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을 때, 그리고 그 음식이 실제로 맛있을 때, "아, 행복해"를 연발하는 아내. 나도 속으로 말한다. '나도 행복해.' 나는 그리 미식가도 아니라 딱히 음식이 맛있을 필요도 없다. 단지 그 순간, 행복해하는 아내 모습이 좋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아내에게 전화할 때
이때도 아내는 "아, 행복해"라고 자주 말한다. 점심시간에 잠깐 통화하는 게 그렇게 행복할 일인가 싶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진심이다. 사실 점심시간은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다. 수면은 부족하지, 배는 부르지, 조명은 꺼져있지, 전화고 뭐고 한숨 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사무실 의자와 하나 되어 잠을 청해 보지만, 그 순간부터 아내의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아 행복해, 아 행복해, 아 행복해.
마음의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내 휴게실로 향하여 휴대폰을 든다. 막상 통화하면 잘했지 싶다.
머리 말려줄 때
어느 날 아내는 샤워를 한 후 너무 피곤하다며 머리를 말려달라고 했다. '그까짓 머리 말리는 것쯤이야, 게 눈 감추듯 끝내고 오리라.' 비장하게 욕실로 향했다. 앗! 머리숱이 많은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이쪽저쪽 열심히 말렸지만 다시 돌아오면 여전히 축축했다. 한 손에는 헤어드라이기를 들고 다른 손으론 머리를 터는데 팔이 떨어질 지경이다.
반면 아내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인다. 거울로 비친 본인의 모습을 보며 '꼬불꼬불 맛 좋은 라면' 춤을 추고 있다. 해맑다 못해 광끼 어린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즐거워하는데 이 정도도 못해줄까.' 하지만 그날 이후 늘어난 아내의 부탁에 '오늘은 좀 피곤한데'라고 얘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날은 실제로 그렇게 말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들리는 그녀의 환청.
아 행복해, 아 행복해, 아 행복해.
결국 "갈게"라고 대답하고 욕실로 향한다.
혹시 아내가 나 모르는 사이에, '아, 행복해'를 들으면 반응할 수밖에 없는 최면을 걸었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말이다. 이 쓸데없는 생각은 어느 맛집 탐방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접게 되었다. 인정받는 식당 사장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사장이 힘들어야 손님의 입이 행복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생판 처음 만난 손님을 위해서도 저렇게 하는데, 하물며 한 아내의 남편일까.
지금까지는 환청 때문에 움직일 때가 많았지만 이젠 아내의 행복 그 차체를 위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리라. 물론 몸이 힘들겠지만 생각해 보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다. 아내의 행복은 가정이라는 소세계를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도달할 테니깐. 나비효과의 좋은 예다.
그러니 아내여, 더욱 힘차고 장렬하게 행복의 날개짓을 해도 좋소. 난 언제든 헤어드라이기를 들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