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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생일] 편지 10_기적

당신의 40번째 생일(부가세 제외)을 축하하는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by 알파카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산왕과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북산은 이어지는 3회전에선 지학에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 슬램덩크의 마지막 부분 중 -


1월 6일 : 편지 쓰기 시작한 날

1월 25일 ~ 2월 2일 : 설 연휴 & 편지 쓰기 중간점검

2월 14일 : 자기의 생일 D-day


적어도 이틀에 하나는 쓰자고 마음먹고 연휴를 맞이했어. 중간점검을 했지.

'음, 평일 15일 중 9개를 썼군.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스스로를 칭찬했어. 그럴만했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메모를 했고 심지어 커피를 주문하려고 줄 서 있는 시간까지도 글을 썼으니까. 점심시간엔 그 달콤한 낮잠도 내줘야 했는데, 누가 뒤를 지나갈 것 같으면 재빨리 Alt + Tab 눌러야 하니,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지.


그렇게 모든 힘을 짜내서 그런지, 설 연휴 이후에는 도통 쓸 엄두를 못 냈어. -회사에 바쁜 일이 겹치기도 했지만- 순식간에 시간이 흐르더니 결국 이 편지로 마무리를 하게 되었어.


참 허무하긴 한데, 그래도 한 가지만 알아줬으면 해. 모든 편지가 다 진심이었다고.


2025년 자기 생일의 마지막 편지는 지금까지의 우리 결혼 생활을 돌아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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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캄보디아에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10여 년간, 우리 어떻게 살아왔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서 그래. 우리가 참 잘했어, 그렇지? 이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싶고 또 자랑스러워하고 싶어.


단 한순간도 다람쥐 챗바퀴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지. 언제나 새롭고 다이내믹했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숨 놓고 나면 또 다른 문제를 만났어.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기를 바랐고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갔고. 올해 드디어 십 년이 됐네.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기쁨과 감사를 찾으려 했던 우리. 이를 통해 희망을 가지고 자족하는 법을 배웠어.


삶에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올려놓으려 하는 그 누군가로부터, 우리는 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또 성공했어. 지금의 삶은 그 전리품이야.


기적을 굳이 병원이나 종교에서 찾을 필요가 있나. 우리가 함께한 모든 시간이 기적이었는걸. 이 기적을 일군 것은 다름 아닌 자기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어. 10년을 옆에서 계속 봐왔는데 내가 모를 턱이 있나. 누구보다 잘 알지. 아래를 봐봐.


당신의 앞치마.

구멍이 나지 않았는데도 헤어질 대로 헤어져 속살까지 보이는 당신 양말의 뒤꿈치.

무릎은 낙타처럼 튀어나오고 엉덩이 부분은 축 늘어져 거의 허벅지까지 내려온 당신의 츄리닝.

한 때 피아노를 쳤던 섬섬옥수, 이제는 실리콘과 백시멘트를 더 많이 만지는 당신의 손.

청소를 하고 나면 새카맣게 변하는 당신의 발바닥.

이러한 당신의 노고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았어. 우리 가정의 어떤 곳도 당신의 땀과 눈물이 묻어나지 않는 곳은 없더라고. 이제는 내 차례야. 자기가 꽃길만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우리 삶이 더욱 행복해질 거라 믿어. 꼭 그렇게 될 거야. 자기는 건강만 해.


우리가 함께 해온 일들과 시간이 기적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기적은 바로 내 옆에 있었어. 기적을 선물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다른 건 없어. 그저 건강만 해줘. 고맙고 사랑해!



2025년 2월 어느 날

당신의 40번째 생일(부가세 제외)을 축하하는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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