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구매 의사결정에 더 이상 왈가왈부 않기로 한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연말정산 시기라 환급여부를 조회했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 우린 늘 추가 납부를 했으니깐. 그런데 웬걸. '차감징수액'이 마이너스가 뜬 거야. 믿을 수가 없었지. 다시 한번 찬찬히 봤는데, 아 맞네 맞아. 결혼하고 10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환급받는 날이 다오네.
기분이 좋더라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좀 안쓰럽기도 했어. 그만큼 우리가 아껴 써왔다는 얘기니깐. 특히 자기는 더 힘들었을 거야. 나야 대부분 회사에 있으니 돈 쓸 일도 별로 없지만, 자기는 다르잖아. 여자로서 그리고 우리 집의 안주인으로서 필요한 게 좀 많았을까. 그럼에도 늘 최소한의 소비를 했지.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었던 거 많았을 텐데 어떻게 참았는지 몰라.
특히 생활가전이 많은 편이 아니라 몸이 힘들었을 거야. 전문 용어로 몸빵을 했다고 하지. 충분히 구매할 수도 있었겠지만 자기는 가정 경제를 위해 참고, 참고, 또 참았어. 그래서 지금의 가정이 있는 거지.
자기의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무수한 옷과 신발이 있는 것을 알아. 하지만 결재를 못하고 있지. 겨울 코트 사는 것도 10년째 미루다가 올 겨울에, 그것도 아주 저렴한 것으로 장만했는걸. 그리고 장 볼 때 온갖 사이트를 뒤져가며 최저가를 찾아 주문하는 것도 알아. 배송되기 전까지 다른 사이트가 더 저렴한 것을 발견하면 이미 이미 주문한 내역을 취소하고 다시 주문하기도 하지. 단 몇 백 원 차이인데도 말이야.
우린 에어컨 구매도 수년째 미루고 있잖아. 작년 여름에는 진짜 더워 죽는줄 줄 알았어. 캄보디아에서는 더 심했지. 월세 200불짜리 집에 사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미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도 전기세 아끼려고 거의 틀지 않았지. 그 더운 기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우린 생활이 아닌 생존을 했어. 그리고 그때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도 엄청 고민했었잖아. 몇 불 되지도 않은데. 참 미안하더라고.
당신을 지켜보던 나는 꼭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었어. 그런데 그렇게 한 두 푼 모아서 여행을 꽤 많이 다녀왔잖아. 특히 유럽여행을 준비할 때가 기억나. 3주 일정의 예상 경비를 계산해 보니 꽤 되더라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심 고민을 많이 했는데, 자기가 강력하게 가자고 주장했었잖아. 아낄 땐 아끼더라도 또 쓸 땐 과감하게 쓰는 당신의 결단력 때문에, 우린 평생 잊지 못하는 추억을 만들었어.
우리 집의 기재부장관이자 안주인인 당신. 계속해서 곳간 열쇠를 맡아줘. 최대한 오랫동안. 자기의 희생의 언덕 위에 우리 집이 이렇게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었어. 아낄 땐 아끼고 쓸 땐 쓰는 자기니깐, 이제부턴 자기가 뭐 산다고 하면 일절 토 달지 않을 것을 약속할게.
2025년 1월 21일
당신의 구매 의사결정에 더 이상 왈가왈부 않기로 한 당신의 남편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