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일기] 02. 나는 지금 솎아내는 중

식당에서 가방까지

by 알파카

김포살이 27일 차. 솎아내는 중이다. '솎아내기'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너무 배게 뿌려지거나 빽빽하게 심어진 식물체들 사이에 공간을 확보해 햇빛과 양분, 수분 등의 생육환경을 양호하게 하고자 중간에 자라는 식물체를 뽑거나 잘라 제거하는 일.
출처: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허나 내가 농사를 짓거나 취미활동으로 식집사가 되지 않는 이상, 이 사전적 의미를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게는 비유적으로 사용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솎아내다'라는 표현과 너무 맞아떨어져 사전까지 찾아보았다. 그러면 요즘하고 있는 이 무엇이냐? 도대체 뭐가 좋고 좋지 않길래 그것을 솎아내고 앉았느냐 하니, 바로 근처의 식당들이다.


요식업계는 자연계의 적자생존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된다. 적응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사라진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30년 된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지은 지 20년 된 가지고는 구축 아파트 명함도 못 내민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오랫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집 주변의 음식점들은 곧 맛의 보증수표와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다음은 이사 이래 방문한 식당이다.

보리밥집, 갈비탕집, 비빔국숫집, 치킨집, 족발집, 칡냉면집, 짬뽕집, 추어탕집 등 생각하면 더 떠오를 것 같아 급히 마무리 지었다. 식당을 방문할 때마다 잔뜩 기대를 품었던 우리 부부는, 기대만큼 실망한 곳도 적잖았다.


음식을 다 먹고 계산대 옆 믹스커피 기계에서 한 잔 뽑아 홀짝홀짝 마시며 집으로 온다. 천천히 걸으며 아내와 복기를 한다. 다음에 또 방문할 가치가 있을까? 되물었을 때, '글세, 안 갈 것 같은데'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 식당은 위 말마따나 솎아냄을 당한 것이다. 식당 입장에선 안타까운 소식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부부만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랄 뿐이다.


더 안타까운 것이 있다. 음식 맛은 합격인데 청결이 불량인 경우이다. 어떤 날은 특정 음식이 굉장히 당길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대단한 미식가도 아니니 근처에 그 음식을 판다고 하면 어지간히 방문할법한데, 청결상태가 불량인 곳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방문하고픈 의지가 하나도 없다. 완전 솎아진 것이다.


인간관계도 이와 비슷했다. 일면식이 있는 모든 사람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 터 한정적인 시간, 물질, 체력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솎아내는 작업을 한다. 반대로 내 주변 사람들도 나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솎아내었을 것이다.


여기서 나의 근심은, 누군가 나를 떠올리며 '저이는 사람은 괜찮은데, 청결상태가......' 하며 나를 솎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이다. 어떤 식당을 떠올리며 '거기는 요리는 맛있는데 위생상태가......' 하는 것과 같다. 나의 미숙함으로 누군가로부터 솎아냄을 당하였을 수 있지만, 그 원인이 청결상태는 아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등골을 떠올리니 내 등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연상되었다. 아내가 그랬다. 내가 집에서만 입는 반팔티셔츠를 기름집에 가져가면, 기름 한 병 정도는 나올 거라고. 참기름은 고소하기라도 하지, 나의 냄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름이 백 년 동안 쩔은 냄새라고 하였다. 문득 출근할 때 메는 가방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최근에 내 등짝과 맞닿는 부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미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냄새를 맡았을지 모른다. 간담이 서늘했다.


그날로 그 가방은 빨래 바구니로 직행했다. 이어 아내의 지침이 하달되었다. 회사 다닐 땐 크로스백을 메고 그 참기름 가방(?)은 여행 때만 사용할 것. 어떻게 하다 보니 식당을 솎아낸다는 게 가방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평생 쓸 '솎아내다'라는 표현을, 오늘 다 것 같다.


202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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