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피소드] 11. 아내의 낭비벽에 대한 복수

그녀는 언어 만수르

by 알파카

노트에 가계부를 적는 아내. '노트북'이 아니고 '노트'다. 어플이나 엑셀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백프로 수작업이다. 자를 대고 가로 세로 줄을 긋고 그 위에 날짜, 사용 내역, 금액을 적는다. 여차하면 종이까지 만들 기세다. AI를 활용하면 몇 분만에 뚝딱 영화를 만드는 요즘, 홀 시대를 역행 중이다. 용감한 것인가 무모한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불쌍한 것만은 확실하다. 가끔 총합계가 맞지 않아 오랫동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 안쓰럽고 안 됐다. 엑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세상 편리하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했건만, 말하는 즉시 귀를 닫는다. 여자 흥선대원군이다. 자기는 이게 좋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나.


거실에 있는 6인용 탁자에 왕처럼 혼자 앉아-모습도 역시 흥선대원군이다- 턱을 괴다가 머리를 뜯다가 계산기를 두드렸다가 발가락을 까딱였다가, 그렇게 밀린 가계부 업데이트를 마친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완공된 느낌이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내가 아내로부터 감동을 받는 부분은, 가계부에 쏟는 수고와 정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부분에서다.


[얼룩진 가계부를 정리하려니 힘들었어.]

[이제부터 허리띠를 졸라매야겠어.]

[다행히 급한 불은 껐어.]

[주사위를 한 번 던져볼까?]


얼룩진 가계부, 허리띠, 급한 불, 주사위 같은, 이런 표현은 도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세상의 모든 관용적인 표현들은 다 알고 있는 듯하다. 또한 그녀의 말은 인위적이지 않다. 나도 초중고를 나왔는데 왜 저런 표현을 못할까. 자괴감이 든다. 물론 글을 쓸 땐 다르다. 하지만 나는 머리를 쥐어 짜야 나오는 것이고, 아내의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다. 인공감미료와 천연조미료의 차이다. 저런 표현을 무심하게 툭툭 내던지는 아내를 보면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음을 느낀다.


가계부 쓸 때만 런가? 그렇지 않다. 위 상황은 작은 일화일 뿐 일상생활 전 영역에 있어 매우 적절한 표현을 한다. 언어 만수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관용적인 표현과 비유가 과도하게 들어가면 듣는 이가 오히려 거북할 것 같은데요? 피로가 누적되듯이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내는 예외다. 필요에 따라 언어모드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의사전달로 언어의 경제성을 극대화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특히 집수리와 같이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억양과 사투리를 해서다.


[가온나] -뭐하고 있어 어서 그걸 가져와-

[나온나] -가만히만 서있지 말고 그곳에서 나와-

[여온나] -이쪽으로 좀 와-

[올려뿌라] -그걸 위에다 올려놔-

[치아뿌라] -당장 치워버려 or 됐다, 관둬라-

[여라] -넣어라-


웬만해서는 세 글자로 다 끝낸다. 물론 그것을 해석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줄여서 말하는 것 또한 재주라면 재주다. 그밖에 '딴진딴진딴진'-피아노 반주 소리-, '야시부리', '움파움파'와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은 또 어떤가.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단어지만 한 번만 들어도 느낌이 온다. '딩동딩동', '두근두근', '주렁주렁' 정도의 나 같은 범인이 사용하는 용어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도 부끄럽다.


이처럼 아내는 언어 표현의 귀재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는, 이러한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데 '왜 글을 쓰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과 느낌을 그녀의 언어로 술술 적어나가면, 요즘 웬만한 에세이보다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 확신하는데, 난 그 재능이 너무 아쉽고 아깝다. 스파이더맨이 세상을 구하지 않고, '아메리칸 갓 탤런트'와 같은 장기자랑 무대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


이와 반대로 안 되는 머리를 굴려가며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나. 곰곰이 생각하니 좀 열받는다. 가계부를 수작업으로 쓰고 있는 그녀가 불쌍하다고 얘기한 것 취소다. 퉤퉤퉤. 있는 사람이 더하다. 이건 낭비다. 재능기부는 못할지언정 재능낭비는 말아야지.


별 수 없다. 아내의 낭비벽(?)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그녀보다 내가 더 나아지는 것뿐. 이를 위해 아내가 하는 모든 표현을 흡수하기로 했다. 뇌의 광맥에 따라 박혀 있는 언어의 보석을 모조리 캐내어 내 것으로 만들자. 이번 주 대화 중 마음속에 저장한 표현은 [홍역을 앓았어], [땀을 한 바가지 쏟았어], [앓느니 죽지], [시장이 반찬이다]이다. 한 번 듣고는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에, 메모장에 옮길 때까지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녀에게 보란 듯이 복수하는 그날까지, 나의 귀동냥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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