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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pago Jan 26. 2018

화폐로 본 동남아의 맹주 크메르의 후손 캄보디아

캄보디아 - 리엘 Riel

캄보디아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나라 중 하나다. 한 때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가 일으킨 대학살로 인해 ‘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가 이제는 유명 관광지로서 부상하고 있다. 중세시대 동남아에서 최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쳤던 캄보디아 역사의 흐름은 자국 화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우선 2만 리엘 뒷면에 보이는 건물은 유명한 앙코르와트이다. 앙코르와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로 꼽히며, 옛 크메르 제국의 고급스러운 건축 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지이다.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부남 왕조로 알려져 있다. 1세기부터 7세기까지 메콩 강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던 부남 왕조는 자신의 속국이었던 진랍에 의해 멸망당한 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7세기 중순에 부남을 복속한 진랍은 안타깝게도 7세기 말, 고대 인도네시아 왕국인 사일렌드라에 점령당했다.

앙코르와트원래는 힌두교 사원?

진랍 왕조가 사라지자 크메르 족은 자유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새로운 크메르 제국이 탄생하였고, 동남아 지역에서 점차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앙코르와트의 건설은 크메르 제국이 12세기에 동남아에서 문화·경제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제국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 맥락에서 언급할만한 신기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앙코르와트가 원래는 힌두교 사원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캄보디아가 불교국가임을 상기하며 의아할지도 모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메르 제국은 12세기까지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면 크메르 족이 언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것일까?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1만 리엘로 넘어가야 한다.

1만 리엘의 뒷면을 보면 네악 페안 불교 사원이 보인다. 이 네악 페안 사원이 세워질 때 크메르 제국의 종교에 영향을 미칠만한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앙코르와트가 세워진 때로 돌아가야 한다.

크메르 제국은 앙코르와트의 건설을 지시한 수리야바르만 2세의 시기까지만 해도 그 힘이 강력했다. 그러나 1150년경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사망하자 정국이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1177년에 왕자들의 권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베트남의 참파 왕조가 크메르 제국을 침공했다.

약 4년 동안 베트남의 지배를 받은 크메르 제국은 1181년에 다시 자유를 얻게 되었다. 1181년에 참파를 캄보디아에서 쫓아내고 크메르 족을 통일시킨 자야바르만 7세는 모친의 종교인 불교에 헌신했다. 비록 국민 대다수는 힌두교도였지만, 민족의 자유를 되찾고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 시킨 그의 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타종교를 믿는 지도자를 성실하게 모셨다.

그렇다면 당시에 앙코르에서 프놈펜으로 수도가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00리엘을 봐야 한다. 100리엘의 앞면에 새겨진 궁전은 캄보디아 국왕이 현재도 사용하고 있는 프놈펜 왕궁이 속한 은탑이다. 은탑을 비롯한 프놈펜 왕궁의 대다수 건물들이 19세기 중순에 오동에서 프놈펜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완성되었다. 캄보디아의 수도 이전 과정을 이해하려면 다시 크메르 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화감독 이력 지닌 독립운동 지도자 시아누크 국왕

자야바르만 7세가 사망하고 나서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지 않자 크메르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타이 족 도시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했고, 오래 버티지 못한 크메르 제국은 수도 앙코르를 떠나면서 암흑시대에 빠져버렸다. 이 시기에는 왕위를 둘러싼 내전과 함께 태국과 베트남에서 온 외부 침략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한 크메르 족이 어쩔 수 없이 수도를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이 와중에 캄보디아 국왕 앙 동의 아들 노로돔은 프랑스와 공식적으로 협정을 맺고 이웃국가의 위협으로부터 확실한 안정을 보장받았다. 이때 프랑스의 교육 제도와 기술이 캄보디아에 도입되면서 현대화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긴 것이다.

그렇다면 캄보디아는 어떻게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것일까? 2천 리엘 앞면에 초상화가 실린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의 노력 덕분에 독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프랑스의 간섭으로 세습 제도를 어기고 19살에 왕위에 올랐다. 식민지 지지 세력들은 시아누크가 나이도 어리고 진보적이기 때문에 프랑스의 간섭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시아누크는 자국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사치스런 생활과 사생활 스캔들로도 유명했던 시아누크는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감독으로도 활약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1953년 캄보디아는 결국 프랑스로부터의 독립할 수 있었다. 2천 리엘 뒷면에 보이는 기념탑은 독립기념탑이다.


돈 밝히는 남자 알파고 시나씨의 캄보디아 화폐 탐구는 여기까지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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