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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Jan 18. 2020

[끄적임] 신사임당님에게 호되게 까였던 면접지원자,

실패 가득했던 20대를 지나


대기업 증권사 인사팀

경제채널 아나운서

지상파 아나운서

금융감독 홍보팀

그리고 퇴사 후 1인기업


이것만 보면 쉽게 쉽게 내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나는 사실 실패의 길만 걸어본 사람이다 :)


부모님은 '안 돼!' '아나운서는 너 같은 애가 될 수 있는 직업이 아냐, 그건 빛나는 애들이 하는 직업이야'라고만 하셨고, 일반기업에 취업하라고 하셨다.


그때는 왜 그리 부모님 말이 진리인 줄 알았는지... 안 된다고 하면 진짜 안 되는 건 줄 알았다. 꿈도 못 꿨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더니 결국 부모님이 바라던 일반 대기업인 증권사에 들어갔다.


방송 따위, 가슴속 깊이 묻고 일에 집중하려는데 잔인하게도 벽걸이 TV에서 아침 출근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주야장천 한국경제 TV가 생방송으로 흘러나왔다. 계속 아나운서, 앵커, 캐스터들이 나와서 에너지를 뿜으며 나를 콕콕 찔렀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면서도 계속 '답정너'를 바랐다.


은 정해져 있으니 누가 좀 대답 좀 해주길. 


'야 너도 아나 할 수 있어~'라는 광고 멘트처럼 누군가 그 답을 말해주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누구나 제코가 석자다.  꿈에 관심 없다.


결국 답정너는 아무 답이 안 나온다. 답 정'나'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때부터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시기다. 부모님 말을 들으면 내 인생 못 살고 끝나겠구나. 부모님 말 반대로 해야 살아남겠구나. 내 인생 내 거다.


모아두었던 신입사원의 월급 전 재산으로 아나운서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비가 360 정도 했던 억이 난다.


게다가, 늘 긴장되고 경직되는 회사 생활과, 말과 감정을 유연하게 표현해야 하는 아나운서 준비를 병행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다. 결국 인생 첫 퇴사하고 인생 처음 백수로 준비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아빠가 백수인 나를 가운 눈초리 째려보았다. 하고 보자. 그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아빠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서야겠다. 


그래서 더 바쁘게 스터디를 꾸리고, 더 바쁘게 준비를 했다. 들 사이에서 '걔, 열심히 하는 애!'로 통했다고 들었다.


스터디를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었다. 스터디원들 중에서 이미 방송을 하던 현직 언니들이 기회를  시작했다.


"리포터 친구가 갑자기 펑크 냈는데 '네가 대신 촬영 갈래?'"


앞뒤 가릴 상황이 아니다. SK 사내 방송인데 전남 영암의 공장까지 행복배달부 콘셉트의 리포터로 피자 배달을 갔다. 피자를 전달하고 SK 공장 직원들을 인터뷰했다.


촬영 후 술자리에서 분위기를 못 띄운다고 PD분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멘털이 강했는지 웃는 낯으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덕분에 방송 영상을 건져서 포트폴리오랍시고 나만의 영상 파일을 만들었다. 지원하는 곳마다 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영상을 꼭 같이 냈다.


그랬더니 곧 KBS 6시 내 고향 리포터 면접에서 연락이 왔다. 다들 쟁쟁한 현직들만 와있어서 어차피 게임이 안 될 테니 모의고사 보러 왔다 생각하고 연습이나 하고 가자 생각했다.


'개인기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 이수영 모창에, 성대모사 발산했다.


'판소리를 취미로 배웠다고요? 최근에 다녀온 곳을 판소리로 들려줘보세요'


 (어차피 떨어질 거니 신나게 불러보자)


피자 배달 과정을 즉흥 판소리 부르며 놀다 나왔다.


재밌다 키키키 하며 나왔는데 엄마가 방송국 로비에서 눈물을 훔치고 계다. ^^;


알고 보니 경비아저씨께서 지원자의 엄마가 오신 걸 보고, 딸 TV 나오는 거 보여주시겠다며, 시험장 내 메라를 방송국 로비 TV에 연결해서 틀어주신 거다.


엄마는 그제야 마음이 무너졌나 보다.

'얘가 이렇게나 하고 싶어 하는데...'


신기하게 그 자리에 바로 합격을 하여 6시 내 고향 전국 생방송을 탔다. 강원도 파트 담당으로 격주로 출연했는데 방방곡곡 촬영을 가기 위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강원도로 갔다. 초반에는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나중에 엄마 아빠께서 새벽 출근과 밤 퇴근을 도와주시곤 했다. 밤 운전을 해주시던 마가 운전 중 졸음을 참으려고 허벅지를 꼬집으며 운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그러다 우연히 외환은행에서 아나운서 역할의 직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고 KBS에서 잘 나온 영상을 모아 보냈다. 역시나 공고에 이력서만 내라고 되어있어도 늘 영상을 꼭 같이 보냈다. 외환은행의 면접을 보고 입사를 하였다.


외환은행 아나운서라는 자리에 오니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당시 외환은행은 한국은행에서 떨어져 나온 매우 신뢰도 높은 은행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그리도 선망했던 한국경제 TV에서 외신 생방송 진행자를 뽑는데 나 혼자 면접을 보게 됐다.


그때  면접관님은 그전부터 페북 친구로 덕후질을 했던 주언규 피디님, 지금의 유튜버 신사임당 님이셨다.

속으로는 '꺅!! 저희 페친이에요!!!' 하였지만

곧바로 멘털붕괴에 이르는 면접이 시작되었다.


지금, 노트북 켜시고요.
 블룸버그 메인 들어가세요.
외신 속보 생방송이라 생각하고
쭉 진행해보세요


처음 겪어보는 방식의 면접이다. 토종 한국인인 내가 미웠다. 아...  토익 900점대라고, 독해 진짜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금융 어휘와 비유적 표현 투성이었다. 알아볼 수 있는 단어 위주로 열심히 설명해보려 했다. 망했다.


잠시의 틈도 안 주시고는 곧바로



영어로 자기 PR 해보세요



원어민의 수준을 바라셨다. 열심히 '아윌 쇼유~ 블라블라' 

말도 안 되는 말을 토종 한국인으로서 뻔뻔하게 하고 있었다.


는 족족 무능력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속이 타들어가고 자괴감에 자존감이 소멸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질문만 시더니 신사임당 님은 바로 나가셨다.


'더 이상 볼 필요 없다'는 암시를 팍팍 주셨다.


너무 미웠다. 무능력한 나 자신이...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헛짓을 해왔구나 었다.


또 떨어졌구나... 앞으로 준비 잘 하면 되지!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신사임당 님이 면접의 기회를 주 자리인데, 다른 PD분께서도 지나가던 길에 '우리 프로그램도 새 진행자를 구할 때가 됐다'며 러 오셨었다.


그분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프로그램에 합격했다고.


데일리 외신캐스터로 시작하자고 하셨다.


더 운이 좋은 건, 현재의 진행자가 월화수목 4일만 나오겠다고 하여 금요일 민지 씨가 MC 역할도 하게 될 거라고 하셨다.


???


뽑히고 나서 들어보니


'좌절하지 않고,

웃는 표정으로,

무슨 말이라도

끝맺음해보려는

성실함'

그리고

선한 인상에

마음이 움직다고 하셨.


정말 감사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PD님도 선한 마음을 가진 '딸바보 PD님'이셨다.)


그렇게 기존에 다니던 외환은행 직원으로 9 to 6 근무는 그대로 하고, 외환은행에 양해를 구하여 퇴근 후 곧장 한국경제 TV로 넘어가 저녁, 새벽 방송 준비를 했다. 


9 to 6 가 아닌,

9 to 다음 날 2.


그날그날 외신 상황을 리서치하고

무슨 외신 이슈를 다루면 좋을지

전문가분들께 여쭤보며

원고를 쓰고, 자막 CG 작업을 하고, 리허설을 한다.


그리고 밤 12시가 되면 생방송이 시작된다.


새벽 2시쯤 방송을 마무리하고 귀가해

끈적한 머리와 메이크업을 지우고 나

4시쯤 잠들고

다시 아침에 외환은행 직원으로 출근하는 삶이

매일 이어졌다.


열심히 살았지만 '잘' 하진 못 했다.


특히 방송은 엉망이었다. 험을 위해 잡아온 기본기가 생방송만 가면 다 무너졌다.


무너졌다는 건 핑계고 체득이 안 된 것이었겠지?


매일 리서치와 원고 준비하는 데만 시간을 쏟다 보니

캐스터로서 진행자로서 스피커로는 습도 못 하고

실력도 늘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 대부분의 시간을

리서치와 원고를 쓰는 일에 들이고 있었는데,

데일리 샛방송으로는 보이는 면

진행력과 전달력만 보이다 보니,


방송 투입 첫 달에는 악플도 많이 달리고,

'저 친구는 누가 뽑은 거야?'라는 시선도 느껴졌다.


사무실에서 신사임당 님을 지나칠 때마다

'안 뽑길 너무 잘했죠?...' 하는 시그널을

나도 모르게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4달 했나.

그래도 이제 조금 더 하면 진짜 잘할 수 있는데, 싶었지만


PD님이 오전 10시의 메인 프로그램으로 이동하시면서

우리의 저녁 프로그램폐지되었다.




'민지 씨는 타고난 스피커가 아니다.
다른 길을 알아보는 게 낫다'



새로운 후속 프로그램으로 온 PD님은 말다, 내 현실을.


그리고 이별이었다. 안녕~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집에 가는 길에 눈까지 내리니 왜 이리 서글픈지! 혼자 울며 노래방에 가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 흑... 흥!



하지만

발은 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을 알았으니 채우자!

실전 기본기부터 다시 잡자!


소리꾼이란 소리꾼은 다 만나서 배워야겠다.

말의 마술사를 찾아서 배워야겠다!


우리나라는 판소리고, 서양에선 뮤지컬이지?


그렇게 막무가내 명창 선생님을 소개받아 찾아뵙고 매주 수업을 들으며 '득음'을 꿈꿨다.


단전호흡, 목 틔우기부터 시작해서 깊은 소리를 뻗어내는 법까지 열심히 배웠고


무대 위에서 말을 노래하는 직업인 뮤지컬 배우 선생님을 찾아가서 뮤지컬을 배우고 훈련했다.


내 몸이라는 악기를 키워가며 말을 노래하는 게 너무나 재밌었다.


그렇게 미친 듯 두 달이 지나고 봄이 왔다.


공채 가뭄기였던 그 시절 유일하게 떴던 MBC 전주 공채 아나운서에 지원했다.


전주는 소리의 고장이고 춘향이네 동네니까

나는 판소리와 뮤지컬을 보여주겠어! 하며

나름의 콘셉트와 캐릭터를 '소리꾼' 아나운서로 았다.


그리고 장점과 약점을 보완하는 전략을 짰다.


늘 차분하고 단아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것을 장점으로 쓸 때는 확실히 쓰되

 이미지로만 굳혀지면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는 걸 알


뉴스 외 장르, 그리고 면접에서는

'청량감 넘치는 사이다'로 콘셉트를 잡았다.


차분함이라는 틀을 깨고 탈피하기 위해.



'성심여고를 나왔네요? 전주 성심여고인가요?'


아~ 아쉽게도~ 서울 성심여고입니다 ^^~

2년 전에도 바로 이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

'전주 성심여고를 갈 걸!
후회를 했던 기억이 나요.

전주 성심여고 대신
전주 MBC에 입사해서
그 한을 풀어보겠습니다 ^ㅇ^!



이 때 보도국장님은 앞에서 2번째 순서인 친구를 뽑아야 한다고 계속 외우고 계셨다고 한다.


앞에서 2번째,

바로 나다. 하하


그리고 필기를 거쳐, 최종면접...


엄청난 공격적인 톤으로 던져주시는 압박 질문을 받았다. 지원자를 여기저기 쿡 쿡 찌르고 쑤셔서 진짜 인성이 드러나게 하려는 면접 같았다. 일종의 스트레스 테스트!


'아나운서가 언어의 마술사라는 직업인데, 어휘력이 왜 그러시죠? 더 적확한 어휘를 쓰셔야죠?'


'무대를 끌어나가야 할 아나운서가 되겠다면서 이 정도 면접에서 떨어요?'


'기자를 하지 왜 아나운서를 하려고 해요?'


'볼에 있는 건 상처? 흉터? 가요?

(나는 볼에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땐 그것이 공격 면접인 줄도 모르고

 '아 또 떨어졌네, 역시 내 길이 아닌가 봐'하며

우울한 먹구름을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다른 길을 알아봐야겠다 하고.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에 전화가 왔다.


합격했다. 1등이다.


...


헉...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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