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해보는 스페인에서의 추억
계기는 <윤식당2>이었다. 스페인에 갔다 온 지 2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스페인 앓이는 몇 번 있었다. 우연히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 <원 나잇 푸드 트립> 등 스페인을 무대로 한 프로그램이나 건축가 가우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을 때, 서점에서 바르셀로나 한 달 살이에 관한 책을 발견했을 때… 짧게는 2~3일 길게는 한 달 넘게 스페인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심할 땐, 매일 밤 핸드폰으로 바르셀로나 항공권과 숙박권, 에어비엔비를 알아봤다. 이번 스페인 앓이가 전보다 조금 더 심한 건 요즘 스페인어에 푹 빠져있는 데다 내가 참 좋아하는 먹는 이야기라서 그런 것 같다. 마음 같아선 당장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싶지만 그럴 순 없기에 스페인에 갔을 때 좋았던 곳들을 찬찬히 곱씹어 보기로 했다. 먼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눈에 휘둥그레졌던,‘역시 미식의 나라답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 보케리아 시장부터다.
보케리아 시장은 유럽 내 가장 아름다운 시장으로 꼽히는 곳이다. 규모 도어 마 어마 하고 하루 방문객이 평균 30만 명이라고 한다. 시장은 람블라스 거리 서쪽에 위치하는데 입구에는 ‘산 호셉 라 보케리아(St.JOSEP LA BOQUERIA)’라는 간판이 달려있다. 보케리아 시장의 유래가 바로 이 간판에 숨겨져 있다. ‘보케리아’라는 이름은 12세기, 바르셀로나로 들어오는 문 중의 하나인 플라 데 라 보케리아에서 비롯됐다. 여기에서 도축 업자들이 육류, 채소, 생활필수품을 팔면서 시장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가 개발되면서 이 문은 없어졌고 대신 시장은 람블라스 거리에 있던 산 호셉 수도원 밭으로 이동했다. 19세기에 수도원은 없어졌지만 오랫동안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먹거리를 책임졌던 시장은 살아남았다. 바로 지금의 보케리아 시장이다. 간판의 ‘산 호셉’은 보케리아 시장의 전신인 성당 이름에서 따온 것. 산 호셉 시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두 눈을 사로잡는 건 형형색색의 과일과 채소들. 그 색감만 보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영롱하고 아름답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는 속담대로 더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좌우 균형이 완벽하고 빈틈없이, 아주 근사하게 쌓아 올려진 물건들을 보니 ‘가히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의 후손답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기에 좋은 건 과일과 채소뿐만이 아니다. 젤리와 초콜릿도 이곳에선 헨젤과 그레텔 속 과자집이 되어 손님들을 유혹한다. 츄파춥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1958년 바르셀로나 기업가 엔리크 베르나가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이 사탕의 포장지는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디자인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고 사랑한 도시답게 사탕 하나도 범상치 않다. 시장에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올리브 관련 상품도 다양하다. 기름을 짠 형태에 따라 산지에 따라 오일들이 구비되어있고, 절임, 페스토부터 선물용 올리브유 세트까지 판매한다. 하몽 역시 지나치면 안 될 스페인 대표 식품이다. 하몽은 돼지 뒤쪽 넓적다리를 통째로 소금이 절여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동안 건조 및 숙성시킨 햄. 사람 몸통만 한 크기에 압도되고 천장에 무심하게 매달아 놓은 모습에선 하몽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하몽 역시 돼지 품종과 생산지에 따라 다양하다. 어떠한 맛을 선호하는지 모른다면 가게 주인장에게 도움 요청하면 된다. 하몽 구매 의사를 표현하면 시식용으로 2~3종류를 한 점씩 썰어준다. 맛을 본 후 원하는 하몽을 알려주면 그 자리에서 하몽을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밀봉해준다. 하몽의 본고장 스페인에선 하몽을 어떻게 먹는지 궁금해 주인장에게 물어봤다. 그의 대답은 ‘다른 재료를 곁들이지 말라’였다. 한국에서 주로 멜론 등 과일과 먹는데 좀 의외였다. 이유는 ‘정말 맛있는 하몽은 그 자체만으로도 맛있기 때문’이란다. 짧은 영어로 유용한 팁 하나를 얻었다.
바다를 접하는 지형적 특징 덕분에 보케리아 시장에는 해산물이 유독 신선하다.‘여행 중에 해산물을 어떻게 요리해 먹지?’라는 걱정이 들 때쯤 눈이 번쩍 뜨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가게에서 손님이 고른 해산물을 그 자리에서 조리해주는 모습을 본 것. 게다가 이런 가게가 한두 개가 아니고 꽤 많았다. 나와 남편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를 골라 튀김으로 즐겼다. 레스토랑도 인상적이었다. 레스토랑이 ‘ㅁ’ 자 구조, 손님은 테두리에 빙 둘러앉고 셰프들은 ‘ㅁ’의 안쪽에서 요리를 한다. 주방이 오픈된 덕분에 셰프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오호, 재료 손질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지금 팬 위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요리가 우리 건가?’ 맛있는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 새 요리가 서빙되어 있다. 좋은 요리에는 좋은 술을 함께 하면 좋다는 남편의 말에 따라 맥주와 와인 한잔을 곁들였다. 식사 후, 스페인 사람들의 자부심인 Cava(카바)를 구입했다. Cava는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스페인식 스파클링 와인으로 샴페인과는 품종이 다르다. 엄선된 포도를 압착한 주스만 사용하는데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기포와 풍부한 향, 청량감이 일품이다. 숙소에서의 와인 파티를 위해 시장에서 나오는 길에 치즈도 구입했다. 농수축산물 시장으로 시작한 보케리아 시장은 북유럽인, 아랍인, 동양인들이 모여 자국의 식재료를 교류하며 동시에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인 장점을 가졌다. 덕분에 다채로운 식재료들이 어우러진 요리들이 발달했다. 바르셀로나에는 1만 개 이상의 레스토랑이 영업 중이고 그중에는 미쉐린 가이드의 별을 받은 레스토랑이 9곳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보통 수준의 레스토랑에서는 menu del dia(오늘의 요리)라는 스페인 특유의 식문화도 만나볼 수 있다. 이처럼 보케리아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 본연의 기능을 넘어서 세계에서 아름다운 거리이자 바르셀로나의 문화·예술 중심지인 람블라스 거리에 스페인만의 미식 문화를 꽃피우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의 문장들
| ¿Tienen jamón?(하몽있나요?)
| ¿Puedo ver esé?(그것을 볼 수 있을까요?)
| ¿Cuánto cuesta?(얼마예요?) || Ciento ochenta euro.(180 유로예요.)
| Muy caro/barato.(너무 비싸요/싸요.)
| Un descuento, por favor.(깎아주세요.)
| Me lo llevo.(이걸로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