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기념일
날짜에 대해 배운 김에 스페인의 기념일을 소개할까 한다. 거의 매달 축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축제의 나라로 불리지만 그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4개, 동방박사의 날(Los Reyes Magos), 세마나 산타(La Semana Santa), 모든 성도의 날(El Día de Todos los Santos), 나비다드(La Navidad)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페인 방문 중에 이러한 축제를 만나게 된다면 당황하지 말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 하나가 되어 즐기는 것도 좋겠다.
국민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인 스페인에서 1년 중 가장 성대하게 치러지는 동방박사의 날 행사.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 동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온 3명의 현인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처음으로 섬김을 받은 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스페인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가 많은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이날을 크리스마스보다 중요하게 여긴다고. 스페인의 크리스마스 휴가가 동방박사의 날인 1월 6일까지 이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동방박사의 날 행사는 전날 밤부터 스페인 각 지역의 주요 광장과 길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이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퍼레이드가 진행된다. 동방박사와 하인 복장을 한 퍼레이드 참가자가 어린이들과 사람들에게 사탕을 뿌려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쏟아지는 사탕비를 향해 손을 뻗고 점프를 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한가득이다. 퍼레이드에서 사탕을 수확한 후 집으로 돌아온 어린이들은 집에 편지와 양말, 음식을 놓아두고 잠이 든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왜?’라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동방박사가 선물을 가져온다는 점을 떠올리면 어린이들에게는 동방박사가 산타클로스인 셈. 편지에는 ‘지난 한 해 동안 착하게 생활했어요’라고 피력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양말은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선물을 담는 용도이다. 동방박사가 3명이기 때문에 양말도 3켤레를 걸어둔다고 하니 귀엽기도 하다. 함께 두는 음식은 먼 길을 온 동방박사와 그의 하인들, 낙타를 위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린이들은 선물을 뜯어보고 어른들은 로스꼰 데 레예스(Roscón de Reyes)라는 케이크를 준비한다. 다양한 과일과 아몬드, 생크림이 올라간 모습이 여느 케이크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왕관, 반지, 동방박사 인형이 들어있고 그 부분을 먹는 사람은 한 해 동안 행운이 따른다고 전해진다. 어린이들도 못지않게 어른들도 축제의 기분을 만끽하는 날이 바로 동방박사의 날이다.
세마나 산타(부활절 전 일주일에서 열흘)에는 스페인 전역에 있는 천주교 신도들이 100여 종류가 넘는 이동식 무대를 들고 밤낮으로 행진한다. 이동식 무대는 예수의 고난, 부활 등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못 박힌 예수 조각상을 들거나 십자가를 메고 걸으며 예수의 고통을 체험하거나 눈만 뚫린 고깔 모양의 예복을 입고 악기를 연주하며 행렬하는 신도들도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지역마다 행진의 모습이 다양한 것. 세비야에서는 무거운 마리아상을 들고 구시가지의 좁은 길을 행렬하고, 카르타헤나에서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살베 마리아를 합창한다. 쿠엥카에서는 종교 음악 콘서트를 열기도 하며 알바세테에서는 2만 개의 북을 두드린다. 행진의 규모는 천차만별이며 최대 2천 명이 넘는 신도들이 이 행사에 참여한다. 일부 신도들은 예수의 모습을 그린카드나 사탕을 나눠주기도 하며 묵음 행진 시, 구경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위한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Nadie más muerto que el olvidado.” 스페인에서는 잊힌 사람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매년 11월 1일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을 위한 추모 의식을 갖는 날이다. 어떠한 사람들은 이 날을 위해 며칠 전부터 묘지 주변을 정리하기도 한다. 가족들과 꽃을 들고 공동묘지에 모여 그들을 추모한다. 덕분에 모든 성도의 날은 1년 중 공동묘지가 가장 화려한 날이기도 하다. 추모의 날이지만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함께 할 인생을 감사히 여기는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달콤한 전통 디저트를 먹는다. 우에소스 데 산토(Huesos de Santo)는 사람의 뼈를 닮은 비주얼 덕분에 성도의 날을 대표하는 과자로 꼽힌다. 길쭉한 아몬드 페이스트리 반죽에 달걀노른자를 넣는 것이 전통 방식. 요즘에는 달걀노른자 대신 코코넛, 초콜릿 등을 채우기도 한다. 부녤로스 데 비엔토(Buñuelos de Viento)는 우리나라의 찹쌀 도넛처럼 생긴 빵. 안을 초콜릿 또는 생크림으로 채우고 겉을 설탕이나 계피 가루를 골고루 묻혀 먹는다. 디저트 말고도 이 시기에 사람들이 꼭 먹는 간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즐겨 먹는 군밤이 그 주인공. 작은 모닥불에 삼삼오오 모여 몸을 녹이고 밤을 나눠 먹는 모습에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나비다드는 12월 25일 단 하루지만 휴가 시즌은 성모 마리아 축일(Dia de la Inmaculada Concepción)인 12월 8일부터 동방박사의 날인 1월 6일까지 이어진다. ‘휴가가 엄청 길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천주교 신자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이 기간에는 스페인 곳곳에서는 다채로운 행사들이 열린다. 그중 특이한 전통 행사를 꼽자면 단연 오게라스 데 나비다드(Hogueras de Navidad)이다. 12월 21일 그라나다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으로 동지에 불을 뛰어넘으면 건강하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위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오게라스 데 나비다드를 시도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면 엘 고르도(El Gordo)를 구입해보자. 엘 고르도는 추첨식 복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복권을 구입하면서 크리스마스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고. 덕분에 12월 22일 열리는 복권 추첨 행사인 로테리아 데 나비 나드(Loteria de Navidad)는 국민 프로그램이 된 지 오래. 나비다드 이브(La Nochebuena)에는 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돼지고기를 비롯한 각종 육류와 해산물 요리, 뚜론(Turrón) 등의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며 풍요로운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을 보낸다. 자정이 되면 작은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고 자정 미사에 참석하기도 한다. 참고로 스페인에서는 동방박사의 날에 선물을 기원하는 문화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선물 교환 의식은 우리나라만큼 성대하지 않은 편. "Esto noche es Noche-Buena. Y no es noche de dormir"(이 좋은 밤은 잠을 위한 시간이 아닙니다)라는 스페인 속담에 따라 밤새 파티를 열거나 캐럴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떠들썩한 이브를 보낸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당일은 예상과 달리 고요하다. 집에서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거리에 종종 그네를 타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보이지만 이브의 분위기에 반의 반도 안 된다. 조금 이색적인 행사를 보고 싶다면 카탈로니아로 향하자. 여기에선 어린이들이 얼굴이 그려진 통나무를 담요로 감싸고 음식을 먹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인데 통나무를 애지중지 여기는 모습이 앙증맞다. 바르셀로나 코파 나달에서는 1907년부터 시작된 크리스마스 기념 수영 대회도 열린다. 다른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행사 말고 스페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원한다면 잊지 못할 순간이 될 것.
참고 <스페인이 내게로 왔다>(책나무출판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