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유용한 몇 가지
여유로울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다가 바쁠 땐 ‘이렇게 일만 하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쉴 틈 없는 프리랜서이자 살림은 ‘조금씩 자주’보다는 ‘한 번에 몰아서’하는 편인 주부. 냉장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요리하고 남은 재료들이 점점 쌓여갔다. 오랜만에 냉장고를 열었을 땐, 재료들이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나서 의도한 요리를 하지 못한 적도 더러 있었다. 냉장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지레짐작할 뿐,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백 번 양보해서 외우지는 못해도 알아낼 방법조차 없었다. 그런 식으로 냉장고가 점점 미지의 영역이 되어갈 때쯤, ‘이러다간 냉장고가 세균 배양실이 되겠어’라며 생존의 위협과 비슷한 걸 느끼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개선의 가능성이 열리기 시작한 것. 냉장고만큼은 ‘한 번에 몰아서’가 아닌 ‘조금씩 자주’의 노선을 택하게 됐다. (덕분에 '어랏, 그런 재료가 집에 있다고? 대단한 걸?'이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요리 좀 하는 사람'처럼 어깨를 으쓱대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노선 3가지는 이렇다.
2인 가족이지만 남편은 입이 워낙 짧고 마감하는 주에는 저녁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1.2~1.5인 기준으로 요리를 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마트에서 파는 제품들은 소포장인데도 불구하고 양이 많다. 대파의 경우, 5~6단이 한 묶음인데 우리는 일주일 동안 겨우 1단 쓸까 말 까다. 쓰고 남은 대파를 냉장고에 두었더니 물러서 버렸던 적이 꽤 많았다. 그렇다고 대파를 먹지 않을 것도 아니라서 안 살 수도 없는 노릇. 버려지는 재료도 아깝고 나중에 언젠가는 쓸 때를 대비할 방법을 강구했다. 결국 대파를 얼리기로 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에는 대파를 손가락 길이 정도로 잘라서 얼렸다. 요리할 때 원하는 크기로 자르려고 하니 단면이 깔끔하지 않았다. 미끄러워서 손을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했다. 얼리기 전, 용도에 따라 미리 자른단다. 그대로 따라 했다. 육수용, 국(또는 찌개) 및 반찬용으로 나눠 손가락 한 마디 크기, 어슷(또는 송송) 썬 후, 한 번 사용할 양만큼 나눠 담아 얼렸다. 이 방법을 마늘, 고추, 양파, 감자에도 응용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바쁠 때, 된장찌개를 끓여야 하는 상황에는 된장만 풀고 얼려둔 채소를 꺼내 한 데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됐다. 바쁘지만 밥만큼은 제대로 먹고 싶을 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을 때, 더군다나 손이 느려서 재료 손질하는 게 부담스러워 요리가 부담스러운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재료를 구입했을 때,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재료가 떨어질 때까지 편리했다.
| 재료별 용도에 따른 손질
대파 어슷썰기, 송송 썰기
마늘 다지기, 편 썰기
고추 송송 썰기
양파 크게&작게 다지기(볶음밥 및 반찬용), 채썰기(볶음 반찬용)
감자 크게&작게 다지기(볶음밥 및 반찬용)
레몬 편 썰기
결혼 전, 엄마 품에 있던 때는 몰랐던 냉동식품의 위력을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쌀국수와 볶음면을 좋아해서 자주 해 먹는데 그럴 때 해물이 빠지면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매번 해물을 사면 좋겠지만 앞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그건 쉽지 않다. 그때 든든한 지원군이 바로 냉동 해물 모둠이다. 새우, 홍합, 조개 등 맛을 내는데 필요한 재료들이 손질까지 되어 있어 요리 초보인 나에게 꽤 유용한 제품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조림 반찬이나 찌개를 끓일 때도 활용할 수 있다. 또 다른 냉동식품은 치킨 너겟이다. 처음에는 남편 술안주용으로 구입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카레라이스에 토핑처럼 올려 먹었더니 맛이 괜찮았다. 볶음밥이나 덮밥 요리할 때, 밥만으론 2% 부족할 때 바삭바삭하게 구워 곁들여 먹는다. 냉동식품은 아니지만 최근에 구입하기 시작한 품목이 있다. 바로 떡갈비다. 양념이 된 채로 익혀둔 제품이라 먹기 직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감칠맛도 좋다. 밥반찬은 물론, 토마토 파스타에 미트볼 대용으로 넣어 먹어도 잘 어울린다. 손바닥을 활짝 편 크기라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얼려두면 그렇데 든든할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구이용 소고기도 냉동실에 상주하는(상주시키는) 재료다. 소고기라는 것만으로도 보장이 확실한 보험을 들어둔 기분이 들고, 일하느라 기력이 쇠해졌을 때 원기 보충하는 데 그만이다. 갈비, 치마살 등 부위 상관없이 2회분 먹을 분량을 항상 사둬야 마음이 놓인다.
| 그 밖의 냉동실 상주 재료
블루베리 소분하여 얼려두고 주스를 만들 때 사용
레몬 슬라이스하여 얼려두고 쌀국수 끓일 때 사용
조림 반찬 및 전 소분하여 얼려두고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음
명란젓 소분하여 얼려두고 상온에서 해동하여 먹음
빵 및 떡 소분하여 얼려두고 상온에서 해동하거나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음
지난 가을, 앞의 2가지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방법이다. 남편 혼자 두고 중국으로 여행을 가게 됐는데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냉장고 속 음식을 꺼내 먹지 못할까 걱정이 돼 정리를 한 게 발단이 되었다. 냉장실, 냉동실로 구분한 후, 서랍 별로 정리된 재료들을 적어서 냉장고 앞에 붙였는데 이게 장 볼 때는 물론이거니와 요리를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장 보러 가기 귀찮을 때 겸사겸사 냉장고 파먹기 하는데도 여러모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셈. 덕분에 불필요한 지출도 줄었고, 있는 재료로 후다닥 만드는 요령 예를 들면, 특정 재료를 색다르게 먹는 방법이나 있는 재료들의 궁합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덕분에 전에 몰랐던 재료의 새로운 맛도 알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는 조리법을 터득하게 돼 뿌듯하다. 리스트는 재료를 구입할 때마다 바로 업데이트하고, 3개월에 한 번씩 냉장고를 정리할 때마다 새로운 종이에 다시 만들고 있다.
제대로 된 것도 아닌, 그럴듯한 집밥을 먹고 싶다는 일념이 요리 무식자이자 귀차니스트를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다. 참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