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복지? 스위스 회사들은 의외로 냉정하다

유럽 생활이 안정적이지만은 않은 이유

by 은달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매주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가는 남자친구에게서 밤에 전화가 왔다. 보통 1박만 머무는지라 내일도 얼굴을 볼 텐데, 왜 전화했는지 궁금했다. (우린 같이 살고 있으므로 전화는 자주 하지 않는다)


전화를 받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나 오늘 정말 힘든 날이었어..."


평소 일에 대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그였기에 무슨 일이었던 건지 걱정되었다. 물어보니 그가 속한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가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늘 단체 미팅에서 예고 없이 팀원들을 대거 잘랐다는 것이다. 그가 속한 팀은 아직 잘리지 않았지만 클라이언트의 말로는 1-2주 내에 필요없는 인원들을 모두 정리할 것이라고 했단다. 어떻게 하면 이 회사가 자신을 컨설턴트로 계속 써줄지 고민해야 될 것 같다고 했다.


이 사태는 그가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워낙 큰 프로젝트였기에 200명 정도의 외부 협력자들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위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연초 회의를 할 때 프로젝트의 성과가 지지부진하여 내년까지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한 윗분들이 화가 나서 당장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모두 정리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만약 그가 이 프로젝트에서 잘리게 될 경우 회사를 통해 다른 프로젝트를 알아봐야 했다. 그는 회사에서 대체로 좋은 평판을 갖고 있었으므로 만에 하나 잘리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프로젝트로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며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위로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라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 회사들은 막연히 복지도 좋고 절대 잘리지 않을 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복지가 좋은 건 사실이다. 단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만이다. 만약 직원의 실적이 좋지 않거나 해당 직원이 필요 없다고 느껴지면 언제든지 해고 통보를 날릴 수 있는 것이 스위스 회사들이다(다른 유럽 회사들은 잘 모른다. 나는 스위스에 살고 있으므로 스위스 기준으로 이야기하겠다. 독일의 경우 잘리기 훨씬 어렵다고 들었다). UBS 에서 일하시는 한 한국인 분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 있다. 바로 옆자리 동료 책상이 갑자기 없어지기도 했다고.


물론 실업급여가 있다. 1년 이상 연속 근무시 해고 후 1년 동안 80%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단 스위스인/ 영주권자에 한해. 나같이 비 EU 시민에 회사에 비자가 묶여 있는 경우 해고되는 순간부터 1개월 내에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스위스를 떠나야 한다. 현재 내 신분으로 1개월 안에 새 비자를 받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결론은 영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일자리를 잃으면 짐 싸서 한국에 가야 한다. 내가 올해 영주권을 무조건 신청하려는 이유다.



이번에 한국에 가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직장에 대한 이야기도 꽤나 했는데, 연차에 따른 급여 차이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부분도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친구들의 설명에 의하면 대개 한국의 기업들은 "연차" 에 따라 월급이 조금씩 오른단다. 나는 한국 기업에서 오래 일해본 적이 없어 전혀 몰랐다. 우리 회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매년 연봉협상을 해야만 내 연봉을 올릴 가능성이 있다. 그것도 올려달라 해서 무조건 올려주는 것은 절대 아니며,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작년의 경우 나의 성과가 확실했기에 직원 평가가 있던 날 나는 상사에게 3가지 근거를 대어 연봉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다. 회사 측에서는 상의한 후 결국 내 연봉을 약 7.5% 올려주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잘 모르겠다. 곧 또 직원 평가가 있을 예정이지만, 지난번에 연봉을 올려받은 이후로부터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에 연봉협상은 당분간 미룰 예정이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내가 일하는 회사는 분명 자유롭지만, 그렇다고 천국은 아니다. 결국 내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기 위해 성과로 보여주어야 하며, 회사 측에서 장기적으로 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경우 얼마든지 나가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염두해야 하므로 일할 때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특히 나는 외국인이기에 실직자에 대한 자국민 보호를 받기도 어렵다. 나의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마다 직장 문화와 시스템이 다르고, 거기에서 오는 애로사항 역시 각자 다를 것이다. 장점만 있는 회사도, 단점만 있는 회사도 없듯이. 개인적으로는 '내가 발전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회사 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 같다. 현재 회사는 내게 기회를 많이 주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만 없이 다니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회사와 같은 마인드로 '나와 맞지 않는다면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이직이 자유로워진 건 사실이니까. 서로가 유연해져야 하는 세상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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