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 일기

무슨 일 하세요? 란 질문

며칠 전부터 백수입니다만

by 김알람

2023년 3월 23일

오늘은 지역 기반 보드게임 모임이 있었다. 나는 S란 친구의 지인인 M을 통해 보드게임에 입문했는데, 셋 중 가장 추진력이 있던 S를 중심으로 세 명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여 보드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보드게임 모임이 2년이 넘어가고 있다. 참고로 현재 멤버는 나, M 그리고 M의 지인과 나의 전 회사 동료다. 우리를 연결시켜 준 S는 6개월 정도 모임을 함께하다 일정이 바빠져 모임에서 나갔다.


오늘 갔던 지역 기반 보드게임 모임은 위에서 설명한 지인 기반 보드게임 모임과는 다른 모임이다. 지인끼리 한 달에 한 번 만나 하는 보드게임에 감질나던 차에 당근마켓에서 구인글을 보고 참여하게 되었다. 단톡방에는 몇십 명이 있지만 나오는 사람 수는 매번 다르다. 자주 나오는 사람도 있고 안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거 내가 나가도 되는 거 맞나? (인터넷 익명 모임을 볼 때마다 나의 내면의 소리)


나는 원래 소심하기 짝이 없는 데다 사교성도 없는 편이라 모르는 사람을 잘 만나고 다니는 편은 아니다. 취미 생활이 맞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만드는 모임은 인싸들의 전유물일 뿐 나 같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보드게임을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 내면의 소리를 묵살해 버렸고, 큰 맘을 먹고 오픈 카톡에 들어갔었다. 거의 매주 모임이 있길래 기뻤던 것도 잠시, 대체로 출퇴근 시간이 늦어서 몇 번 참석도 못했다.


퇴사 후 주어진 자유의 시간. 소중히 써야 할 것 같지만 강제로 하던 출근이 없으니 내 몸은 천근만근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죽도록 힘들다. 회사는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내가 자유의지로 하는 것들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인데 어째서 전자를 할 때는 아침에 눈도 번쩍 뜨이고 침대에서도 벌떡 일어날 수 있는데 '시간 나면 해야지'라고 미뤄둔 진짜 '내 일'을 할 때면 나무늘보처럼 침대에서 눈만 깜빡이다가 하루가 가버리는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건 원래 이렇게 약한 걸까? 아니면 내가 소크라테스가 말하던 배부른 돼지인 걸까? 고민 끝에 집 밖에 나가야 할 이유를 강제할 겸 오랜만에 보드게임 모임에 참석 투표를 했더랬다.


조촐히 모였던 모임은 즐거웠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문제(?)는 즐겁게 보드게임을 한 후 카페에서 나와 멤버 한 분과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가며 발생했다.


"알람(가명)님은 무슨 일 하세요?"


무슨 일을 하냐고.png 아... 저요?


당시 우리는 일상적인 스몰토크를 하는 중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고, 정적이 흐를게 두려웠던 나는 보드게임을 하던 중 이 분과 다른 멤버 분이 했던 대화를 기억에서 꺼내며 두뇌풀가동을 하며 대화 주제를 던져댔다. 아직 공부를 하고 계신다길래 관련된 이야기를 물어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그분은 주제가 떨어질 때쯤 올바른 사회인답게 나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을 말로 설명하는 건 참 힘들다. "쉬고 있어요" 그 말을 하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지만 내 머릿속과 다르게 입에서 나온 말은 tmi가 따로 없었다.


"원래는 ~분야의 일을 했었는데 이번 주에 퇴사해서요. 지금은 쉬는 중이에요."


며칠 전 퇴사했다는 말은 내 자의식이 무심결에 펼친 방어막이었을 것이다. 그냥 백수는 아니고요, 백수 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전 아주 최근까지도 성실한 사회인이었답니다. 내 무의식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 그러시구나. 그럼 다른 일 준비하시는 거예요?"

"음... 그건 아니고 몇 개월 쉬려고요."


일 년 넘게 일했으니 쉴 수도 있지. 분명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왜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는 이토록 꺼려졌을까? 순식간에 벌어진 내 머릿속의 패닉을 그분이 알 수 없었다는 게 다행이다. 체감 시간은 영원 같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음성은 태연했고, 우리는 그 후로도 이야기를 하다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버스에 타서 그분이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의 감정을 곱씹어보았다. 부끄러움. 그리고 그 직후에 느꼈던 건 부끄러움을 느낀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이 타인의 눈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분명 머리로는 괜찮은 일이라고, 그렇게 해도 된다고 수십 번 다짐했던 '내가 선택한 내게 옳은 일'을 타인 앞에 선 부끄럽게 느껴버린 것은 슬픈 경험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수치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도 내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내가 지금 내 상태를 무의식 중에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니까. 아마 이 수치심은 침대에서 느꼈던 돼지의 삶(?)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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