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일기를 쓰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
2023년 3월 31일
오늘은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일단 퇴사하고 한 달은 놀자!"
그렇게 다짐했던 나에게 3월은 일종의 덤으로, 일단은 3월 며칠과 4월 한 달을 풀로 노는 시간으로 보내고자 생각 중이다. 예전부터 막상 판 깔아주면 못 노는 소심쟁이라 "놀아야 돼, 최선을 다해 놀아야 돼. 이제 4월부터 시작이야!"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내일이 오는 게 약간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는데 내가 아는 노는 거라곤 침대에서 휴대폰으로 놀기 정도에 불과하니, 까딱하면 계속 침대에 붙어있게 될 테니 정신줄을 바짝 잡고 억지로라도 바깥에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3월 마지막 날. 오늘은 카페에 가서 독서모임을 위한 <갤러리 사운드>를 마저 읽었다. 138쪽을 읽는 중이니 이제 80쪽이 남았다. 남의 말에 팔랑거리는 귀는 스스로의 다짐에도 그런 것인지 '재밌다, 너무 재밌다.' 세뇌하니 어떤 부분은 정말 흥미로웠다.
저자는 책 전체를 세 개의 대주제로 나눠 구성했다.
첫 번째 주제에선 음향을 신경 쓰지 않고 디자인된 '갤러리 Gallery'란 공간을 소개하고, 사운드의 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운드란 소재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했던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한다.
두 번째 주제에선 '갤러리 Gallery'속의 소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종교의 비중이 줄어든 오늘날, 갤러리는 엄숙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 말이 낯설지 않은 게, 실제로 나도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미술관을 자주 갔다. 미술관에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어서가 아니고 oo나라의 유명한 oo미술관을 '체험'하고 싶어서 방문했으니 오사카의 유니버셜스튜디오나 현대의 미술관-책에서는 미술관과 갤러리를 분리해서 이야기했지만 편의의 목적으로 나는 혼용해서 사용했다-이나 현대 관광객에겐 같은 목적의 장소가 된 것이다.
세 번째 주제에선 음악과 갤러리의 교류에 대해서 다룬다. 갤러리란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 음악에 준 영향이나 그 반대에 대해서 다룬다고 하는데 여기까지는 아직 못 읽어서 할 말이 없다.
내가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느꼈던 것은 첫 번째 주제에서 다룬 여러 작품들이었는데, 사실 사운드 작품을 활자를 읽으며 상상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완독하고 나면 책에서 소개한 작품을 촬영한 영상이 있는지 유튜브에서 찾아보고 이 주제에 대해서 포스팅을 해볼 생각이다. 본문 중에서 무반향실-모든 소리를 흡수시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소리를 흡수시키는 장소기에 정적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작가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깜깜한 암흑으로 시야를 차단하면 더더욱 사운드에 집중하게 된다. 정적 속에서 무슨 소리?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그건 바로 '나'의 내부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심장이 쿵쿵대며 뛰는 소리, 그리고 내 혈액이 흐르는 소리까지. 무반향실에서 시각을 통제당하고 외부의 소리를 차단했을 때, 사운드를 통해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지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작가의 이 경험이 재미있게 느껴졌던 것은, 무반향실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나도 약간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약 5년 전 교환학생으로 유럽을 갔을 때 체코의 프라하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틀 일정이었는데 거의 폭설이 내려 하늘은 어둡고 전체적으로 굉장히 추웠다. 이때 아니면 언제 프라하를 오겠나 싶어 열심히 관광지를 돌아다녔는데, 도대체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장소에서 탑을 오른 적이 있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팬스가 쳐져 있었고,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로 반값 할인을 받아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입장료를 낸 후 나선형으로 된 계단을 계속해서 걸었는데 가벼운 운동으로 생각했던 처음과 다르게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날씨 때문인지 시간 때문인지 계단을 오르는 동안 누구도 볼 수 없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아무도 없는 건가?'
처음의 대수롭지 않던 의문은 끝날 기미가 없는 계단을 오르며 점차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변했다. 낮에도 어두침침했던 하늘은 저녁이 되자 더더욱 어두워졌고 탑 안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고요한 그곳에서 들리는 것은 나의 걸음 소리와 불규칙한 숨소리뿐이었는데 재미있는 건 두려움이 커질수록 내 귀에 들리던 발소리와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점차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가선 두려움으로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마치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결말을 말하자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졸도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 때쯤 계단은 끝이 났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눈이 섞인 차가운 칼바람이 내 뺨을 식혔을 때의 감각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막을 찢고 외부로 나간 것처럼 주위의 소리가 들렸다. 10명이 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친구들끼리 놀러 온 듯한 외국인 남자 한 명이 휴대폰으로 드라마 왕좌의 게임 OST를 틀고-그럴만한 분위기였다, 분위기나 날씨가 윈터펠 뺨쳤다- 주위를 돌고 있었다.
사실 내 경험이 오직 '극단적인 고요함'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시각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내가 희미한 소리를 정신적으로 증폭하며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지했던 첫 번째이자 지금까지는 유일한 경험이었다.
사실 오늘은 일기 쓰기를 건너뛰려고 했다. <갤러리 사운드>란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쓸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번에도 한번 일기 쓰기를 건너뛰었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일기 쓰기를 건너뛰지 않은 게 자랑스럽다. 일상을 기록하기 위한 일기가 아니라 일기 쓰기를 위한 일기라도 뭐 어떤가? 어쩔 땐 쓰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