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후 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끊임없이 보드게임을 했다. 이렇게 하루종일 보드게임을 하고 나면 온몸에 기력이 쭉 빠진다. 앉아서 팔만 움직이며 떠든 것 치고는 굉장한 피로감이다.
말 그대로 하얗게 불태웠다
보드게임에 집중하던 중 테이블에 올려놓은 휴대폰에 진동이 왔다. 보통 내 휴대폰은 스팸 메일이 아니면 잠잠한 편인데, 확인해 보자 예상치 못한 친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알람아, 혹시 내일 시간 돼?"
나와 전공도, 취미도 다르지만 같은 동네에 산다는 공통점으로 친해진 친구였다. 한때는 굉장히 자주 보았지만 친구가 완전히 다른 산업의 다른 직무로 이직을 준비하면서 집까지 멀어지게 되었고, 이후 종종 얼굴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너무 오래 안 봤네, 다음에 꼭 얼굴 보자.'란 메시지만 주고받는 사이 정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메시지를 받은 직후의 마음은 반가움이라기엔 미묘했다. 이전에도 친구와 만날 약속을 잡았던 적이 자주 있었지만 항상 만나기 직전에 파투가 났기 때문이다. 항상 자신의 미래를 건설적으로생각해 나가던 친구가 큰 결심을 하고 완전히 다른 분야를 공부했던 과거를 알았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데 모든 기력을 쓰고 있는 걸 알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 일이 몇 번씩이나 반복되자 약속을 잡는 일 자체가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최근에도 약속을 한번 잡았다가 취소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약속이 취소되고 나면 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연락이 오는 게 연례행사였기에 내 생각보다 이르게 온 친구의 메시지에 놀란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음 날 만나자고 연락하는 친구는 아니었는데.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실제로 내일 아무런 일정이 없었기에 약속은 물 흐르듯 구체화되었다. 보통 서로 시간이 맞는 날부터, 시간대까지 이야기하다 흐지부지 끝나버리던 이전의 경험과는 비할 것 없는 속도였다.
가끔씩 연락을 하고, 이뤄지지 않을 약속을 잡았다가, 결국에는 약속을 파투 내는 너.
'대부분 나는 일정이 없지만, 혹시나 일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하다니. 정말 제멋대로네.'라는 순간적인 생각을 하며 메시지 창을 성의 없이 확인하는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띄었다.
내 대답이 이렇게 성의가 없었나? 원래도 메시지를 살갑게 보내는 편은 아니니까 일부런 아냐. 스스로 변명하며 스크롤을 위로 올리는데 발견한 사실이 있다. 최근 들어 나는 한 번도 그 애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는 거.
우연한 기회로 우리는 동네 친구가 되었다. 한때는 가장 자주 보는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친구가 이직을 하고, 이사를 가면서 우리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져 버렸다. 그리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제는 자주 보지 못하는 이 친구에게 덜 신경 쓰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잘하지 않는 편인 나는,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과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동안의 인연이 끊어지곤 했다. 한때 친했지만 이제는 서로 안부도 묻지 않는 옛 지인들을 떠올리자면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도 모자를 정도다. 그런데 이 친구의 연락은 내게 낯설지만 낯설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우리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은, 그 애가 나에게 항상 오랜만의 문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끊어질 인연을 그 친구가 끝까지 잡아주었기에 우리의 인연이 그나마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연락도 어색할 언젠가의 인연이 아닌, 그래도 연락을 하는 멀리 사는 친구의 위치로. 그것을 깨닫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연결, 새로운 경험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면 뭐 하나. 한 번 맺은 인연을 계속해서 이렇게 말라죽게 만들어버리는데.
아마 그 친구가 나를 급하게 만나려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일 그 애를 만나면, 지금까지의 겉치레 같던 태도를 반성하며 그 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싶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면, 이제는 내가 가끔 메시지를 보내야지. 그 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