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 가지고 놀기
2023년 4월 9일
어제 1. 운동 가기 2. 챗-gpt로 여행계획 짜기 3. 영화 보기를 하기로 나와 약속했는데 절반밖에 못 지켰다. 아무 생각 없이 운동화를 들고 헬스장에 도착하자 불이 꺼져있었는데 원래 일요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등록한 지 3개월 짼데 그걸 지금 알았다.
처음부터 계획과 달라져서 당황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운동 가기 계획은 폐기했다. 그리고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던전 앤 드래곤 : 도적들의 명예>를 보기로 했다.
솔직히 평하자면 정말 재미있게 봤다. 나는 원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대체적으로 다 재미있어하는 편이지만 그걸 감안하고도 꽤 괜찮은 영화다. 이 영화를 좋게 평하는 이유는 다름과 같다.
요즘 극장은 익숙한 소재가 대세다. 놀랄 것도 아니다. 넷플리스부터 시작해서 디즈니플러스, 티빙, 왓챠, 웨이브 등 대 OTT 시대는 사람들의 콘텐츠의 홍수 속으로 빠뜨렸다. 사람들과 힘을 합쳐서 이용료 1/n만 하면 고퀄리티의 여러가지 콘텐츠를 볼 수 있는데 영화 티켓 값은 물가 상승에 발맞춰 계속 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콘텐츠)란 '그 값을 해야'하고 기회비용(티켓 가격)이 높은 지금 관객들은 안전한 선택을 하게 된다. 시대에 발맞춰 관객뿐 아니라 콘텐츠 제작자들도 안전한 선택을 선호하게 되니 슬램덩크나 존윅4같은 검증된 콘텐츠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관객들도 안전하게 그것들을 선택하고, 다시 제작자들은 안전한 콘텐츠를 만들게 되는 우로보로스 같은 상황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던전 앤 드래곤은 익숙하지만 새롭다. 넷플리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서 주야장천 나왔기 때문에 이름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그 콘텐츠를 아는 건 아니다. 안전과 모험, 그 경계에 서 있는 콘텐츠. 그래서 <던전 앤 드래곤 : 도적들의 명예>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요즘에 인스타에서 디지털 아트 게시물들을 찾아보는 게 취미가 되어서 그런지 영화의 VFX가 계속 눈에 밟혔다. 대 OTT 시대에서 영화관을 겨냥한 콘텐츠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토리'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확실히 신경 쓴 느낌이 난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세계를 배경 삼았기 때문에 커다란 화면에서 보면 좋을 법한 이미지 콘셉트를 잡았고, 4DX로 즐길 수 있도록 현란한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인다.
극 중에 드루이드인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구성된 씬이 특히 그렇다. 여러 가지 동물로 변신해서 활약을 벌이는 장면 그녀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압도적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액티비티함을 살리려는 노력이 보였기에 나는 이 영화를 일반 극장에서 봤는데 솔직히 4D로 예매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솔직히 이런 모험류의 이야기에서 독특함을 보이기란 쉽지 않다. 수없이 많은 콘텐츠들이 생산되고 재생산된 시점에서 <던전 앤 드래곤: 도적들의 명예>는 클리셰를 대놓고 이용하는 방향으로 스토리의 재미를 잡는다. 클리셰가 왜 클리셰인가? 그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클리셰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영화는 '가족을 되찾으려는 백인 남자 주인공'의 모험이란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소소한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비틀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좋았던 점은 여자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많이 나온다고 해봤자 남자보다 많이 나온 건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다. 솔직히 중요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신경 쓰는 사람에게는 조금이라도 신경이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티 나지 않는 게 세련된 점이라 느껴진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예민하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자기와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를 콘텐츠에서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한다. 사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여자 캐릭터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콘텐츠는 로맨스 장르밖에 없었고, 다른 장르를 보고 싶으면 그냥 남자 주인공이나 남자 조연에 이입하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그것밖에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웹소설을 보다 보면 '다 좋은데 주인공이 여자네요'하는 댓글을 종종 본다. 여자라 주인공이라 재미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생각이 이해된다. 왜냐면 나랑 다른 환경을 가져서 다른 생각을 가진 주인공에 이입하는 건 원래 노력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존재에 이입하려면 그걸 위한 학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학습을 통해 그 방법을 알게 되더라도 몰입의 정도는 달라진다.
옛날에 <모아나>란 애니메이션이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 그걸 그냥 주인공의 성별이 달라진 클리셰적인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에게 <모아나>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문처럼 느껴졌다. 여자 주인공으로도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구나. 그리고 옛날부터 수십 수백 번을 봤던 똑같은 구조를 가진 이야기라도 주인공이 나와 얼마나 비슷한 존잰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를 그 영화를 통해 체험하게 했기 때문이다. <모아나>를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 이런 영화가 더 많이 많들어져서 어린 여자아이들이 영화 속 주인공에게 '노력하지 않고도' 몰입할 수 있고, 남자아이들에게는 나와 다른 존재에게 '이입'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가 싫고, 영화 속에서 여자들이 점점 많이 나오는 게 싫은 어른이 있다면 그런 영화를 안 보면 된다. 안 그런 영화들이 훨씬 많으니 그중에서 골라서 봐라. 그건 개인의 취향이고 그걸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이 동어 반복일 뿐이라던지, 쓸데없다고 생각한다면 누구에게나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겐 그게 큰 도약일 수 있다.
갑자기 딴 이야기로 완전히 새 버렸는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재밌었다. 밝은 느낌의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으로 느껴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이 정도면 극찬이다. 영화의 더 좋았던 이들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는 점이다. 시리즈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너무 길게 질질 끌어서 지치게 하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