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방에 있어 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2023년 4월 23일
23일 일기를 오전 2시 27분에 쓰고 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의 독서 모임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조금 멀리까지 이동했다. 예전에 잠깐 언급한 <갤러리 사운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정말 오랜만에 봐서인지 다른 이야기만 실컷 하게 되었다.
주제는 사운드와는 관련이 없는 ai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챗 GPT를 포함한 AI기술의 등장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미드저니를 하고 있기 때문에 미드저니를 포함한 AI그림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했고 한 지인은 챗 GPT를 어떻게 일에 활용할 수 있는지, 다른 지인은 NFT에 관련하여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했다.
사실 퇴사를 한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노는 것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 나는 약간의 조바심이 든 상태였다. 이제 슬슬 틀만 잡아 놓은 이력서를 채우고, 채용 공고를 알아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가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어중간한 마음으로 취업 준비를 할 바에야 몇 주 더 놀자는 생각도 들었다. 5월 중에 이름 있는 공모전이 있기 때문에 그것까지만 준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어렴풋이 '이제 다시 이력서를 넣어야지' 하고 생각해 봐도 막막했다. 왜냐면 나는 '어떤 산업, 무슨 직무'로 지원을 할 것인지조차 명확히 정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지금까지 나는 다양한 산업의 일을 메뚜기처럼 넘나들었고, 1년 이상 근무한 경험은 최근에 그만둔 인디게임 팀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회사'보다 '소규모 팀'의 느낌이 강했기에 그곳에서 내가 얻은 경험이 다른 게임회사에서도 유용한 스킬일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 상태였다. 게임을 만드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정말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깨달음도 주었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나의 기준으로는) 오래 근무하게 된 이유도 '게임 산업'에 대한 절대적 흥미보다는 구성원들에 대한 호감,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회사의 성장과 나의 성장이 같이 갈 수 있겠다는 패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다른 '게임'회사에도 내가 적응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퇴사 후 한 달. 30일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한 달이 지났다는 사실 때문인지 이렇게 나의 머리는 복잡했었다.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머리 한쪽으로 미뤄둔 채 나는 오늘의 모임에 나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 4차 산업 혁명 및 최근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낯선 환경에서 낯선 이야기를 하는 것 만으로 우중충하던 머리 한 구석이 조금은 맑아졌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일 관련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잘 모르는 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각자가 느끼는 최근의 고민들을 가볍게 나누면서 나도 그들에게 조언을 건네고, 그들도 나에게 조언을 건네는 시간이 진행됐다.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오늘 만난 사람들이 나와 얼마나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언급하려 한다. 그리고 서로의 상황을 말하던 그 순간의 분위기가 굉장히 장난스러웠다는 것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까 말까 고민하는 지인에게 우리는 '고민 말고 해 버려'라고 툭 던졌고, 글쓰기-여기서 말하는 글 쓰기는 일기가 아닌 포트폴리오를 채울 글을 쓰는 걸 말한다-를 해야 하지만 글쓰기가 힘들다는 나의 말에 그들은 '그냥 졸작이라도 계속 만들어라' 하고 대꾸했다. 이건 순화해서 한 말이고 정확히 말하면 '계속해서 똥을 싸라'라고 했다. 수십 개의 똥을 만든 후에야 봐줄 만한 것이 나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냐는 핀잔에 나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움의 미학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상황이 바뀐 것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산업과 직무, 공모전,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글쓰기와 흘러가는 시간의 문제로 뒤섞인 소용돌이 안에 서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만남.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진 지인들과의 대화는 가만히 놔두면 끝을 모르고 안으로 침잠하는 나의 의식을 억지로 잡아 뭍으로 이끌어냈다.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하라'는 둥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둥 가볍게 던졌다. 아니, 어쩌면 상황은 모르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듣고 싶어 하는 바로 그 말을 상대에게 건네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보드게임에 취미를 붙이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 나는 역시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많아 선택하는 걸 두려워한다. 인생에서 이 두려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게 되고 그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결과를 내게 안겨주었다.
처음 보드게임을 시작했을 때, 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 상황에서 내게 무엇이 최선일까?'를 고민하면서 많은 시간을 잡아먹곤 했다. 지금은 꽤 나아져서 차례를 순식간에 척척 진행할 때도 있지만 아직도 가끔은 안절부절못하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하지만 보드게임이 인생과 다른 점은 선택하지 않아도 '선택하지 않음'이 선택이 되어 흘러가 버리는 현실과는 다르게 게임에선 내 마음이 아무리 복잡해도 필수 행동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물론 차례가 없는 게임도 존재하지만 지금은 차례가 있는 보드게임만을 생각해 보자) 가끔은 차례를 패스할 수 있는 게임도 있다. 하지만 차례를 넘길지 말지도 결국 나의 선택에 의해 진행된다. 인생에서 하던 것처럼 선택하기를 회피하며 시간을 죽인다면 다음 차례 사람에게 '시간 끌지 말고 빨리 행동을 하라'는 핀잔만 들을 뿐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잘못된 선택들이 이번 판의 패배를 야기했다고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게임에서 졌다고 지구 종말이 일어나진 않는다. 그냥 내 기분이 좀 나쁠 뿐이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해서 게임에서 졌다는 사실은 엄청난 불쾌감과 후회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불쾌감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패배를 맛볼수록 잘못된 선택으로 얻었던 자괴감은 점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패배로 인한 불쾌함마저도 그다음 게임을 즐겁게 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어쩔 때는 이전의 잘못된 선택으로 교훈을 얻어 다른 게임을 더 잘하게 되는 깜짝 이벤트도 있다.
이렇듯 보드게임에서 나는 어쨌거나 행동을 선택해 내 차례를 마치는 방법과 잘못된 선택이 패배로 나를 이끌지라도 그냥 잠깐 기분 나쁠 뿐이라는 사실을 몇십 번에 걸쳐 배우고 있다. 마치 보드게임이 나를 위한 자그마한 인생 튜토리얼이 된 기분이다.
머리가 복잡해 집안에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타인과 보드게임을 할 일도, 독서 모임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혼자 심각함에 빠져있는 내 상태를 와장창 깨줄 사람도 계기도 없다. 그러니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내면의 굴 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서 타인을 만나야 한다. 외부와의 작은 접촉이 만들어낸 파동이 나를 둘러싼 쓸데없는 심각함을 깨뜨려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첨언하자면 내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할수록 '타인'과 만나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게 좋다. 술집에서 만나서 서로의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건 경험상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흥미와 재미만이 우스꽝스러운 심각함을 깨뜨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