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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옳은 Mar 06. 2022

근평은 늘 도망가

지방직 9급 공무원 승진 적체

갓 발령을 받고 9급 1호봉, 첫 월급이 들어왔을 때 ‘월급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돈이지?’라고 생각했다. 어엿한 직장인이라기에는 버는 돈이 어설펐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사람을 살리거나 구제하면서 내 인생에도 보람을 가져다 줌과 동시에 전문성을 키워주는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다. (쉽고 빠르게 염화칼슘을 뿌리는 방법이나 말이 안 통하는 어르신의 화를 가라앉히는 스킬은 늘었다.)


니가 언제 이 주민센터를 매입했는데!


박봉에 보람도 찾기 힘든 이 직업에 한 가지 간절해지는 게 있다면 ‘승진’이다.

한 직급에서 다음 직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근무성적평정을 통해 ‘수’라고 부르는 점수를 받아야 한다. 수우미양가 할 때 그 ‘수’다. 주변에 공무원 친구가 “나 이번에 ‘수’ 받았어.” 혹은 “근평 받았어.”라고 하면 “승진에 가까워졌구나!”하고 축하해주면 된다.

사무실에서 열받는 횟수만큼 ‘수’를 받을 수 있으면 너도 나도 벌써 사무관일텐데 기회는 1년에 두 번 뿐이다. 우리 과장님 혹은 동장님이 나에게 ‘수’를 주셨는지에 따라 지금 근무하는 부서에 더 남아있어야 하는건지, 다른 부서로 옮겨 근평을 관리해야 하는건지 동태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인사 이동 시즌과 함께 근평 기간에 직원들이 예민해지는 이유다.

내 계획대로 된다면 발령 순서대로 선배들이 승진을 하고나서 내가 근무한 지 3년째 되는 시점에 8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이나 국가직은 9급에서 8급까지 1년 6개월이면 승진시켜준다고 들었는데 우리 구는 유독 적체가 심해서 3년만에 승진을 하면 다행이다.)

그러다 곤란한 소식을 들었다. 우리 국이 없어진단다. (국-과-팀 순서로 작은 단위다.) 애초에 정식 국이 아닌 TF 형태라서 시간이 지나면 해체가 되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근평을 받기 직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니.

우리 과가 공중 해체되는 결과는 피했지만 내 승진의 기쁨도 나를 피해갈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근평은 소속 국의 국장님이 주시는건데, 우리 과가 편입할 새로운 국의 국장님께 나는 굴러들어온 돌이었다. 박힌 돌, 그러니까 지금껏 고생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 기존 9급 직원들에게 근평을 주면 어쩌나 걱정됐다.


별의 별 일을 다 해볼 수 있었던 첫 근무지

결과적으로는, 계획대로 승진을 했다. 3년 2개월만이었다. 굴러온 돌(나)은 11월 발령이었고 기존 국 내 직원분들은 2달 늦은 1월 발령이었다. (나는 임용유예자라서 1월 정기 인사 때 발령받지 않았다.) 고작 두 달 차이지만 근무 기간을 점수로 산정하는 공무원 승진 체계에서는 무시하지 못하는 차이였나보다. (그 차이가 무시되지 못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도 사실이다.)​


승진은 정말 짜릿했다. 그간 고생한 게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디선가의 누군가들은 더 쉽고 빠르게 되는 8급이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이 사람은 3년 동안 골치아픈 일들과 힘들게 하는 사람들 속에서 배우려는 자세를 유지하며 성실히 근무했기 때문에 이 상을 드립니다.”라는 말이 쓰여있는 것만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받았다는 기분이 들어 묘하기도 했다. 주변 분들의 “너도 이번에 해야 할텐데….”라는 걱정어린 말이 내 조바심에 불을 붙이곤 했다. 8급 승진은 그렇게까지 걱정을 받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웬만하면 남들 하는 때에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기관 전체에 드리운 승진 적체 현상 때문에 너무 부담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되어버렸다.

전국적으로 모든 지방직 9급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억울한데 심지어 한 기관 안에서도 모두 같은 처지가 아니다. 승진 경쟁자가 많은 부서에 배치되는 바람에 격무에 시달리며 울면서 근무를 했는데도 승진이 늦어지는 직원도 많다.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보다 발령을 빨리 받았는지, 해당 국 안에 선배가 다 승진을 이미 했는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다보니 부서배치 운이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8급 승진 대상자들이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는 위치라서 업무 실적으로 서열을 매기기 어려우니 발령 순서대로 승진한다는 관례를 따르는 게 합리적이라는 점에는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시스템 앞에서 무기력한 건 똑같아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지우기 어렵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의 일부를 필사해봤다. 8급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성장하는 9급들도 많다.

승진 적체가 어서 해소되기만 바랄 뿐이다. 우리 구도 언제나 8급 승진이 3년, 3년 반씩 걸렸던 건 아니다. “승진이 적체돼서 어쩔 수가 없어요.”라는 말은 가뜩이나 코로나와 선거 업무로 지쳐있는 9급 직원들에게 이 직업에 대한 희망을 더 지워버리기만 할 뿐이다.

자세한 속사정도 모르고 인사팀 속상한 소리만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렇다 할 보람을 찾기 어려운 우리 조직에서 8급 승진만큼은 너무 힘든 일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능성을 잔뜩 품고 능력을 펼칠 기회를 기다리는 멋진 새내기 직원들이 주변에 많이 보인다. 나를 포함한 이런 젊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면 때맞춰 조직이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라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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