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린 열아홉들에게

by 미래

오늘 아침부터 수능에 관한 뉴스들을 많이 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속에 수능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을 걱정하는 목소리들이었다. 화면에 잡히는 고사실로 들어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나의 지난 수능날도 떠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 19살.

참 예쁜 나이에 대학이 뭐라고 그렇게 애를 쓰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을까. 지나고 보니 질끈 묶은 머리에 안경을 써도 교복 입고 다니 던 그때가 제일 맑고 밝을 때였는데.


어쩌면 태어난 순간부터 대학이란 종착역만 바라보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누구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구구단을 다 외우고, 학년에 맞지 않은 선행학습을 따라 가느라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데 괜히 쫓기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대학 서열에 따라 내가 갈 위치가 보이고.

모든 수험생들에게 대학이란 내 삶의 종착역과 같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대학이야 말로 성공한 인생을 위한 무기가 되고, 수능은 내 인생을 바꿀 유일한 순간이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고작 6시간 동안 치러지는 수능이 19년의 세월을 판가름한다는데 인생을 건 승부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동트기 전 새벽부터 일어나 낯선 학교의 교실에서, 심지어 방역까지 신경 써가며 보는 시험.

'참 쉽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수능 볼 때 수능이 주는 압박감, 긴장감만 잔뜩 안고 시험을 쳤던 기억이 있다.

시험 보는 내내 손이 떨리고, 심장이 콩닥콩닥거렸다. 이 시험을 망치면 안 되는 생각.

오직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가채점 결과 생각보다 점수가 저조했고 무엇보다 내가 낙오자처럼 느껴져서였다.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을 게 없는 느낌. 혼자 낭떠러지에 떨어진 느낌.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 같았다. 이대로 생(生)을 포기해야 하나 걱정하기도 했다.


그땐

"잘하고 있어"라는 주변의 위로도 조금도 위로되지 않았고,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무책임한 조언 따위도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오늘 수능을 보고 온 학생들도 예전의 나처럼 드디어 일생일대의 순간을 끝냈다는 안도감보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좌절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버리지 마.
언제나 소중한 존재야



인터넷이 너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수능 시험이 끝나자마자 답안 결과나 등급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가장 끔찍했던 건 수능 끝나고 3주쯤 지나 수능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죽을 날 미리 받아 둔 사형수처럼 수능 끝난 날의 홀가분함을 다 느끼기도 전에 지독히도 끔찍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죽을 걸 알고 끌려가는 소처럼 성적표를 받아가는 발걸음도 꽤 무거웠다.


숫자로 알려주는 내 인생의 처참함.

그때 처음으로 인생의 씁쓸함을 맛봤다. 수학을 제일 싫어했지만 숫자는 늘 우리 곁을 따라다녔다. 점수를 매길 때도 등급을 나눌 때도. 심지어 연봉계약서를 마주할 때도 등급으로 사람을 점수 매기는 결혼정보업체들처럼 나를 평가하고 판단 내리는 건 단호한 숫자들이었다.


수능 성적표를 받고 나서야 선생님이든 학생이든 바쁘게 대학을 찾기 시작한다. 물론 세상이 너무 좋아져서 대학도 점수별로 서열별로 분류되어 있고, 내 점수만 숫자로 입력하면 내가 갈 수 있는 대학 이름을 딱 나온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그때 처음으로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질 수 없구나'를 느꼈다.

19살은 참으로 어린 나이에 사람이 살면서 느낄 모든 감정들을 한 번에 그것도 아주 빨리 느끼게 했다.

안타깝지만 이런 게 현실이었고 인생이었다.




모든 수험생들아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고,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다고 해서

너무 쉽게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번 수능 한 번 잘 보지 못했다고 모든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 길 바란다.

인생이 끝내야 할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할 걸 알지만

19년이란 그 긴 시간 동안 참 많이 발전하고 성장한 사람이니까.

때론 결과가 아쉽다면 한 번 더 도전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의 인생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꿈을 위해서라면 한 번 더 도전하는 것쯤은 별 일 아니었다.





실제로 첫 수능을 보고 인생을 포기해야겠다고, 내 인생은 왜 되는 일이 없냐고 사람을 원망하고 현실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건 꿈 때문이었다.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모두가 꿈을 이루는 것도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성공하지 않는 세상은 이미 지났다. 물론 살면서 더 좋은 학벌이 더 쉽에 밥을 먹여주는 때도 있다. 그런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현실이 하루아침에 바뀔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더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1년 동안 열심히 한 결과에 조금이라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한 길이 한 번의 도전으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용기를 내어도 좋다 생각한다.


그렇게 재수를 시작했고 재수도 성공했다 말하긴 어렵지만 그 속에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찾았다.

수능이 인생을 바꿔준다는 말도 어느 정도는 맞지만 인생을 바꿔준다는 건 학벌에서 나오는 자부심이 아니라 내 인생에 대한 목표과 방향에 대한 내면의 자신감이다. 재수를 시작할 땐 실패자였지만 이제야 그때 내 결정이 내가 실패를 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나는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등 끊임없이 스스로를 알아갔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됐다.



현실은 생각보다 너무 차갑고 냉정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가 너무 작다고 느껴질 때도,


되는 일이 없어

스스로를 자책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놓지 말자.

스스로를 놓아버리지 말자.


유일한 내 브런치 북은 나에게 하는 말로 시작했지만

모두에게 위로가 되는 글이길 바랬다.


내가 수능을 2번 보고 대학을 가고, 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다.

내가 나를 저버리는 순간, 나를 붙잡아 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걸.

이런 마음가짐이면 오늘 수능을 못 본 게 인생을 망친 것도 , 삶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

더 단단한 나로 살아갈 시간을 주는 것이다.


매 년 수능이 끝나면 수험생 자살 보도가 의외로 너무 많다.

꽃다운 나이에 아직 다 피지도 않은 삶에 스스로 꽃을 꺽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고했다'는 말로는 다 위로가 안 되지만, 포기하지 지금 모두가 일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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