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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Apr 27. 2019

심정섭의 대한민국 입시지도

대학을 꼭 가야 할까?

<SKY캐슬>을 보질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로는 드라마 속 학생들이 최상위권 학생들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책에 의하면, 최상위 학생들은 보통 영재고나 유명 과학고에 있다.

문과 학생이라고 해도 수시 비율이 70퍼센트에 육박하는 현실에서 뛰어난 인재들은 정시 이전에 각 대학에서 데려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수능과 내신은 중요하다.
하지만, 최상위권 학생에겐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아마도 드라마는 상위 0.1%의 학생들이 아니라
상위 0.1%의 상류층 가정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 둘이 항상 일치하진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부모가 명문대 출신이어도 자녀들은 공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공부란 우리나라 입시에서의 ‘문제지 잘 풀어서 선호하는 대학을 가는’ 좁은 의미의 공부를 말한다.
서울의 대치동이나 목동 같은 명문 학군에도 이런 자녀들이 많다.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자사고나 강남 일반고를 다녔는데도 Top30위권 혹은 인서울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p. 278-279

이 책은 영어유치원부터 유학, 대안학교까지 입시의 거의 모든 걸 망라했다.

특히 그 속에 입시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통찰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통찰대로라면 입시는 무의미해진다.
‘어떻게든 일단 대학에 집어넣는 방법’부터
‘대학에 꼭 가야 할까?’까지 모두 아우른다.

입시가 무의미해진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대학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건 대학이 아니라 대학 이후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 가다.

원래는 상위 10% 대학을 나오면 상위 10%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이름 있는 대학에 적성도 맞지 않는 아이를 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대학이 더 풍성하고 행복한 어른이 되게 만들어 줄까?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아직도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대로 대학은 가야지, 대학 생활은 해봐야지, 남들 눈도 있는데, 남들 다 가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입시는 전략의 문제에 앞서 소신의 문제고 용기의 문제가 된다.

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전반적으로 이 사회가 너무 빨리 완성형 인간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대학이(그리고 모든 기업이) 뛰어난 인재보다는 완성된 인재를 뽑기 원한다.
어차피 뛰어난 인재는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이 채우고 남는 자리를 위해서는 완성된, 혹은 뛰어난 척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청소년들이 어떻게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어떤 확신을 가져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고, 그 방법에 대해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실패(재수 이상)도 몇 번 허용되지 않는 판에서. 선택에 대한 책임도 개인이 온전히 짊어져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수능 한 번, 혹은 두 번으로 결정되고, 낙인찍히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
그러니까 자꾸 사교육의 도움을 받아서 입시 전략을 짜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이 혼자서, 혹은 가정 내에서 소화할 수 있는 실행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확고한 미래관을 가진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은 정규 교육과정에 특화된 공부머리가 좋은 아이들일 뿐이고, 당연히 그런 아이들은 소수인 게 상식 아닌가.

우리나라는 소수의 공부머리가 좋은(공부머리가 두뇌 전체의 평가를 말하진 않는다) 사람들만을 우대하는 사회인가?

슬프게도 그렇다.

우리에겐, 우리 아이들에겐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렇게 더듬더듬 찾아가는 건 열등한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원래 그렇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미래를 알고 있다는 듯 자소서를 쓰게 하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인간은 원래 변덕도 심하고 관심사가 이동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해 쥐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그건 죄가 아니다.

어떻게 모든 인간이 같은 시기에 대학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그건 정부가 꾸는 꿈같은 거다. 규격에 맞춘 삶.
아이들이 왜 정부의 꿈을 이뤄주려고 자기 인생을 구겨 넣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교육 제도 자체가 ‘나’를 위한 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됐다.

신용등급이 나란 인간의 실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은행들의 편의를 위해 지들 멋대로 등급을 매긴 것과 같이, 수능 등급과 내신 등급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대학, 기업들의 편의를 위해 나의 일부를 단순하게 수치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게 마치 그 사람을 말해주는 모든 것인 양 사람들은 생각한다.

입시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제공하는 교육이 과연 ‘나’를 위한 교육일까?

학교 교육은 ‘나’를 위한 것을 주지 않는다. 나는 ‘나’를 위한 교육을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그것도 시험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평생 말이다.
나 자신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가장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맞춤형 교육은 독서다.
지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교과서가 아니라 독서에 투자하고 있을까.
불행한 일이다.

공교육은 이미 유명무실해졌다.
한 인간으로서 자라는 데 필요한 교육도 제공해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족집게 학원도 되지 못한다.
교사들의 권위가 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엎드려 자는 것도 일리가 있듯이 말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법도 결국에는 각자도생이다.
모든 가정이 공부를 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이와 함께 고민해서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큰 흐름을 파악하고도 중심을 잡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기는 정말 쉽지 않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입시 레이스에 뛰어들지, 소신을 가지고 아이에게 맞는 다른 대안을 찾을지는 순전히 각 가정의 선택이다. p. 294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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