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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Oct 02. 2019

항구의 사랑

나는 어떻게 이반이 되었나

좋은 기획이 돋보인다. 이 기획이 출판사에서 시작된 것인지 작가 개인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도는 양쪽 모두에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출판사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더욱 확장된 페미니즘/여성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작가 개인으로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니 말이다. 『김지영』에서 봤던 좋은 기획력이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전까지 하찮게 여겨지던 소재를 진지하게 재조명하고,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만큼은 새롭지 않을까.

『김지영』 때만 해도 일반적인 페미니즘 이야기(그것도 지극히 온건한 성향의) 만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이런 ‘틈새’ 이야기까지 나오는구나 싶어서 반가웠다. 역사 속에 묻혀야만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발굴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않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작은 시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p. 171, 작가의 말



(이하 스포일러)





그녀들은 어쩌다 ‘이반’이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갇혀 지내야 했던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여학생들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철저하게 남학생들과 분리되어 그저 입시만을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여자학교라는 장소는남학생들과의 접촉이 마치 어떤 감염이나 오염이라도 된다는 듯이무균실처럼 기능한다.



하지만 여학생들을 격리시킨 이들이 이해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중요한 사실은, 여학생들의 마음에 사랑하고자 하는 본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욕망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 게다가 그들은 청소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p. 153



철저하게 이성으로부터 격리된 여학생들은 그들만의 사랑을 발견했다. 어른들이 박멸했다고 믿었던 그녀들의 욕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 곁에 있는 동성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이반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마치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디스토피아 SF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던(혹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부다. 동성애 외에도 그들은 TV 속 가수들에 열광하고, 그들을 가지고 팬픽을 쓰기도 한다. 모두 그녀들이 억압 속에서 욕망을 표출해내는 또 다른 방식들이다. 그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또래의 남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특별한 관심을 주고, 설렘을 느끼게 해 준다면. 다른 아이들과 구별해 줄 모종의 사연, 로맨스를 선사해 주기만 한다면. p. 46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동성애는 금기였다. 하지만 그 금기는 어른들에게만 심각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여학생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의 항목에 불과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파격으로 이끌었다. 선생님들은 그 사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동성애라고 부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p. 26-27



동성애 성향이 아니었던 화자는 앞선 이유들로 인해 동성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물론 그녀는 당시에 그렇게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선택을 했던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그 추억은 철저하게 폐기되어야만 했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
p. 150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청소년기의 추억이나 첫사랑의 기억을 강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한때의 유행이자 ‘미친 짓’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만을 동성이 아닌 이성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그것은 극히 평범한 청소년기의 풋사랑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것은 미친 짓으로 치부된다. 그것이 그녀들의 잘못이었을까? 스스로 선택한 탈선이었을까?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p. 103



차라리 실제로 동성애자였다면 덜 억울했을까? 억울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짧은 낙원을 맛본 셈이다. 자유롭게 소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 동성애가 오히려 쿨하고 멋진 일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을 한국 사회에서 경험해본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마법은 사라진다. 바깥세상은(다시 말해 남자들의 세상은)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혐오를 넘어 공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만약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면 내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뭔 소리야. 무서워. p. 152



결국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는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상처만 남겼다. 애당초 왜 그녀들은 보호‘당해야만’ 했던가. 왜 이반은 남학교보다 여학교에서 범람했던 걸까. 남학생들은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 건 아닐까. 여학생들에 비해 남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은 상대적으로 방임되고 묵인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성다움을 강요당하고, 남성 성기를 마구 들먹이는 문화는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성향이든 이성애 성향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대학에 진학한 화자는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이반에 머물고 있는 인희를 비웃는다. 그것이 진짜 그녀의 성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결국 역할극을 벌이는 건 화자 본인도 마찬가지다. 성인 여성, 그것도 서울에 거주하는 성인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 태도를 익히기에 바쁘다. 그것이 자기 욕망과 일치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알고 보면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회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사회화된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역할을 흉내 내고, 그 흉내를 통해 사회화된다.



인희의 모습이 중고등학교 때는 괜찮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이상해진 이유는 뭘까. 그때는 그런 것이 용인되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환경에서 그 모습은 조금 유난스러울지언정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환경이 바뀌면서 그것이 기이해 보인다. 환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화자가 습득하는 ‘여성스러운’ 사회화는, 다시 또 다른 환경으로 옮겨진다면 얼마든지 이상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기던 사회화의 모습이 다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단순히 관습화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 깨달아 가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화 과정에 있어서 애초에 화자가 롤 모델로 삼은 것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사랑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그녀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던 화자는, 자신도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마는 평범한 여자가 됐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실망한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가치에 쏟고자 했던 열정은 평범한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망할 일이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실망하고만 자신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녀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랑에 목매는 여자는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말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종속되는 삶은 가부장적 시스템 아래로 여자를 옭아맨다. 광주 항쟁 때 이야기를 하며 화자는 좀 더 대단한 대의(大義)를 위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사소한 것에 머물면 여자는 그냥 여자로 남기 때문이다. 철저히 격리된 여자학교에서 화자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유일한 탈출구, 희망이었다.



언젠가 시골 외할머니를 보며 사람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태어나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그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기억해 주나? p. 97



물론 화자가 100퍼센트 자의적으로 동성애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여성 동성애의 장점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다.



또한 당시 우리의 조건에서는 남자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 애인이 이 모든 요구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가오는 생일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도 굳이 내색하고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p. 46-47



화자가 좋아했던 가수는 조성모이고, 친구 민지가 좋아했던 가수는 god의 손호영이었다. 모두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내세웠던 남자 가수들이다. 성인이 된 화자는 남성적인 모습을 추구했던 인희를 무시하고 창피해 하는데, 인희가 하는 언행들은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모습을 꼭 닮아있다. 학창시절 인희에게서 느끼는 혐오감은 마치 정신연령이 낮은 같은 또래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느껴진다. 화자의 남자친구들은 인희의 행동에 더 가까워 보이고, 여자인 화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한 남자 선배는 화자가 조성모를 만나러 구리까지 다녀온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한다.



“나는 미리 알고 대비를 하고 싶어.”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친구를 만나는데 무슨 대비를 해. 알았어, 다음 데이트 때는 하루 전에 일정표를 제출할게.” p. 141-142



청소년기, 남자와 여자를 철저하게 분리시킨 덕분에 성인이 된 이후 만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기에 더 힘이 드는 것은 아닐까. 부자연스럽게 격리된 생활 속에서 여학생들은 남자를 흉내 내는 동성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것은 원본이 아니라 여러 겹의 여과지를 거친 탈색된 사본이다. 브라운관을 통해 바라보는 남자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여학생들이 그런 이미지에 빠져있는 동안 남자학교의 남학생들은 철저하게 마초적인 남성상을 강요받는다. 이런 상태라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여학생들을 남학생들로부터 격리시켰던 선생님들의 의도가 성공한 건지도 모르겠다. 남녀공학 학교가 늘어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사회화 과정이 학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의 벽은 더 공고해지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탈(脫) 연예, 탈(脫) 코르셋을 표방하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니면 선택지가 없는 것 같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 사이에 또 다른 사회화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여자들은 더 이상 항구가 아니다. 그런 시절은 진작에 사라졌다. 사회화 과정 전체를 다시 검토해야 할 때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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