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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Jan 28. 2020

“봉준호는 장르가 되었다”

한국영화와 장르 번안

봉준호는 원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1990년에는 번안의 영역이 점차    없어진다. 번안을 거부하는 세대가 등장하고, 번안이 무력해진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 ‘보편적인 것의 특수화 ‘특수한 것의 보편화 동시에 이루어지고 지역화와  지구화의 과정이 뒤섞이는 상시적 혼종의 시대에 번안은 의미를 잃는다. 이제 더빙이 필요 없는 자막의 시대가 되었다.  p. 168-169, 백욱인, 『번안사회』



‘번안’의 개념으로 2000년대 초의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생각해 보면 수긍되는 지점이 많다.

그 당시 최대 화두는 ‘장르’였다. 누가 더 장르물을 잘 만드는가. 장르물은 필연적으로 번안물일 수밖에 없다. 영화의 주류 장르는 영미권을 중심으로 한 서구에서 생겨났고, 현재도 주도권은 그들에게 있다. 영미권의 장르들을 맥락이 전혀 다른 한국영화 안으로 가지고 오려면 적절한 현지화, 즉 번안이 불가피하다. 한국영화 르네상스 이전에는 그 수준이 전반적으로 형편없었다. 한국관객은 한국영화를 ‘짝퉁’ 정도로 소비했다. 원본은 헐리우드였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주도한 감독들은 하나같이 장르를 한국식으로 번안하는 데 능통했다. 액션 영화를 새롭게 번안한 류승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이스트 무비를 번안한 최동훈(〈범죄의 재구성〉), 블랙코미디의 김지운(〈조용한 가족〉), 일본 만화를 번안한 박찬욱(〈올드보이〉) 그리고 ‘농촌 스릴러’라는 번안장르를 만들었던 봉준호(〈살인의 추억〉).

이들 감독들은 제대로 된 장르 번안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새로운 시대가 왔다. 관객은 더 이상 번안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리지널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관객들의 요청만은 아니었다.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은 하나의 원본이 되었다. 그 영화 이후로 수많은 사본과 번안본이 뒤따랐다. 스필버그의 〈죠스〉는 어떤가. 그 전에 우리가 그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던가. 루카스의 〈스타워즈〉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그들도 엄밀한 의미에서 번안물이다. 하지만 그들이 참고한 원본은 서구의 유구한 장르 역사다.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과거를 번안한 것이다.

한국에서 장르물을 만드는 이상, 우리는 아무리 번안을 멋지게 한다고 해도, 원본이 아니라 번안물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르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외국에서 번안물이 먹힐 리가 없다.



때문에 2010년대 들어와서 주춤하는 감독들이 생겼다. 김지운은 하드고어물을 번안한 〈악마를 보았다〉 이후 내리막길이다. 미국에서 만든 액션영화 〈라스트 스탠드〉는 개성 없는 아류였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작품은 느와르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번안한 〈밀정〉과 〈인랑〉이었다. 원본을 요구하는 해외와 국내팬 모두를 실망시키는 행보다.

박찬욱은 번안한 뱀파이어 영화 〈박쥐〉를 만들고 헐리우드로 진출하지만 원본이 될 법한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스토커〉) 오히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핑거스미스의 번안물인 〈아가씨〉로 건재함을 알렸다. 이후 영국에서 존 르 카레의 작품(〈리틀 드러머 걸〉)을 드라마화 했다. 장르의 본고장에서 번안본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우회의 길을 택한 셈이다.

​어쨌거나 원본이 아닌 번안물만 만든다는 것은 창작자로서 대단한 굴욕이다.

여기서 르네상스 세대의 선두주자인 봉준호 감독의 행보는 흥미롭다.

스스로 독립영화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플란다스의 개〉의 흥행 실패 이후, 그는 제대로 된 번안 장르 영화에 집중한다. 농촌스릴러를 거쳐 괴수물 〈괴물〉, 다시 한국 엄마로 번안된 스릴러 〈마더〉를 거쳐 프랑스 만화를 번안한 〈설국열차〉에 이른다. (이 영화는 한국이라는 맥락을 벗어나는 실험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번안이 아닌 시도를 시작한다. 넷플릭스를 통해서 선보인 〈옥자〉가 그것이다. 〈옥자〉는 한국의 맥락 위에서 시작하는 영화기는 하지만 훨씬 보편적인 세계적 화두를 향해 나아간다. 오히려 그 한국적 맥락은 여느 제3세계로 바꿔도 상관이 없다. 영화적으로 소모된 적 없는 신선한 배경 정도를 제공할 뿐이다.

옥자를 접한 한국 관객은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익히 기대했던 봉준호 특유의 강점들이 많이 희석됐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봉준호를 흉내 낸 어떤 신인 감독의 작품처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좀 더 선명해진 주제와 구도들은 반대로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봉준호에게는 바로 그 점이 중요했을 것이다.

자신의 개성이, 자신의 장르가(봉준호라는 장르가) 원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옥자는 그런 의미에서 의미있는 시도였고, 내 생각에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 무대 데뷔작에 가깝다.



한국에서 번안물은 아직도 잘 먹힌다. 제대로만 번안된다면 말이다. 그런 식으로 아직도 르네상스 세대 감독들은 흥행을 올리고 있다. 류승완은 〈본〉 시리즈를 번안한 〈베를린〉의 실패 후, 〈폴리스 스토리〉의 영향력 아래 있는 <베테랑>으로 흥행에 성공했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의 세대의 감독들도 마찬가지다. 〈무간도〉와 두기봉 영화를 섞어놓은 듯한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이나 〈군도〉, 〈공작〉 모두 잘 만든 번안물이었다. 〈아포칼립토〉와 비슷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최종병기 활〉, 〈데이브〉의 표절이라는 말이 있었던 〈광해, 왕이 된 남자〉, 한국판 〈나우 앤 댄〉이었던 〈써니〉. 아직까지 천만 관객을 불러오는 건 잘 만든 번안물이다.



번안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할 수는 없다. 원본을 만들어내는 일은 중요하다. 때문에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곡성〉이나 〈신과 함께〉가 훨씬 진취적인 결과물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홍상수 같은 아트무비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이것은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장르’의 형식을 띤 문학계나 음악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원본이 되고 싶어 한다. 수용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본이 보고 싶지 어설픈 번안물, 더 심하게는 짝퉁이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원본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제대로 된 번안의 시대를 겪어온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할 수밖에 없다. 자존심 때문인지, 자신감 때문인지, 혹은 책임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봉준호 감독은 일찌감치 그것을 깨닫고 계속 노력해왔다. 때문에 봉준호를 가리키는 〈인디 와이어〉의 저 평가(“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번안물만 만들어왔던 장르 변방의 나라가 얻을 수 있는 최초의 인정이다. 그래서 기념비적이다. 봉준호는 원본이 됐다. 혹은 거의 원본에 근접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 땅의 모든 장르 창작자들은 그 도약에 움찔할 수밖에 없다. 이에 자극받아 앞으로 한국 장르 원본들이 등장할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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