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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량한 Mar 21. 2020

세실과 쇼코

〈세실, 주희〉와 〈쇼코의 미소〉의 일본인 여성

두 작품 모두 한국인 여성과 일본인 여성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단편 소설이다. 작품 속 일본인 여성들의 역할이 다르면서도 같았다.

두 작품의 화자는 일상 속에서 권태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한국 여성이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그녀의 삶에 찾아와 약간의 파장을 일으키는 존재로 일본인 여성이 등장한다. (쇼코와 세실)


이 일본인 여성은 주인공인 한국 여성의 확대·과장된 버전으로 그려진다. 극도로 역사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거나, 외국을 무조건적으로 동경하고, 외부에 이상적인 판타지를 두고 자기 일상을 부정한다. 가부장에 극도로 길들여진 동시에 극도로 그것을 증오하는 존재기도 하다.

그런 묘사는 한국 여성 화자가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거꾸로 설명한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일본인 여성의 상태가 훨씬 심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렇듯 거울 같은 용도로 일본 여성을 끌고 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다. 일본 여성이 한국 여성의 문제를 드러내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인 건 알겠다. 하지만 일본 여성을 도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한국 여성의 자기성찰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혹시 〈82년생 김지영〉을 필두로 한 페미니즘 수출 대상국으로만 일본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시혜적인 시선으로 불쌍하게 바라보는 낮은 여권의 여성들.

한국의 여성들은 그렇게 비교할 대상을 통해 위안을 얻는 존재인가. 우리는 너희 정도는 아니야. 옆집 여자의 불행을 통해 위안을 얻는 여자는 옆집 여자만큼, 혹은 그보다 더 불행해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이 생각난다.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 마력이 없었다면 지구는 아마 지금도 늪과 정글뿐일지도 모르지요.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오랜 시간 동안 남성의 거울 역할을 했던 한국 여성들은 이제 일본 여성을 거울삼고 있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상대적 약자를 통해 획득한 자존감은 진짜 자존감이 아니다.


〈세실, 주희〉의 화자는 일본 여성을 통해 자신의 부조리함을 깨닫는다. 반면 〈쇼코의 미소〉 속 화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일본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얼핏 〈쇼코의 미소〉 쪽이 더 성숙한 의식의 과정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일본 여성에 대한 비하와 이상화를 동시에 해낸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대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들은 한국 여성 화자의 내적 모순까지 보여주면서 객관성의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저자는 화자인 한국 여성을 비판하고, 한국 여성 화자는 일본 여성 캐릭터를 가여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객관화가 아니라 무책임에 가깝다. 모두의 사이를 갈라놓는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게 소위 말하는 여성 서사란 말인가. 여자들이 구제불능임을 늘어놓고 뒷짐 지고 있는 여자 작가라니.


그렇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작 도달한 결말이란 게 무엇인가. 무기력하게 자기 부조리를 깨닫거나 가부장의 영향력을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것밖에 더 있나.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라면 그게 잘못된 거라고 말하는 게 문학이 할 일 아닐까. 고작 그런 결말을 위해 일본 여성 캐릭터가 필요했던 걸까. 기운이 빠진다.


좀 더 진취적으로 외부로 시선을 돌리던 화자들은 매가리 없이 쪼그라들어서는 ‘주제 파악’을 하고 일상으로 복귀한다. 마치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 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이런 작품들이 실제 여성들을 어떤 식으로 교육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문단의 예외적 경우였단 말인가. 이런 문단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이웃 나라 여자들을 불쌍히 여길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부끄러워할 일이다.


(알량한 블로그 http://blog.naver.com/alrya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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