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지역성이 강조된 판타지
그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은 SF 및 판타지의 세계와 설정을 빌려 오지만, 동시에 우리의 현실과 무척 가까운 것들이에요.
- 〈프로듀서의 말〉 중에서
일상에서 시작한 단편들이 서서히 판타지의 강도를 높이는 배열로 배치돼 있다.
일상에 좀 더 밀접한 앞의 세 단편은 얼핏 김동식 작가를 떠오르게 한다. (특히 첫 번째 작품인 「정적」) 하지만 심너울 작가의 경우는 좀 더 밈(meme)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온라인상에서 널리 알려진 밈들을 기반으로, 그 장난기는 그대로 유지한 채 발전, 확장시킨 이야기들이다.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한계도 분명해 보인다. 밈으로서의 딱 그만큼의 깊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매일이 금요일 같았으면 좋겠다’라는 ‘불금’에 대한 밈의 결론은 보통 어떠하던가. ‘금요일의 해방감은 주중의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정도의 체념 아니겠는가.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의 결말도 그 정도에서 마무리된다.
강도를 높여가는 판타지 중에서 내 입맛에 가장 잘 맞았던 작품은 「신화의 해방자」였다.
판타지와 SF의 비율, 판타지와 현실의 비율이 가장 적절하게 결합된 작품인데, 마치 판타지 버전의 〈쥬라기 공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시종일관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다.
후기에서 작가가 밝힌 비화를 읽고 나니, 확실히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은 다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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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공간적인 구체성이 돋보인다. 아무래도 일상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공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정적」의 신촌,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의 한남과 일산,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의 근추동, 「신화의 해방자」와 「최고의 가축」의 관악까지.
그런데 그 공간성이 상당히 대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촌과 관악에 있는 대학은 명문대의 상징과도 같다. 일상이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아무나 겪을 수 없는 곳의 일상이다.
「경의중앙선에서 마주치다」에 등장하는 한남동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집이 있다는, 부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그에 비교되는 일산의 백마역은 상대적으로 얼마나 비루해 보이는지. 밈을 바탕으로 한 덕에 공감을 쉽게 얻기도 하겠지만, 백마역 이용자나 일산 주민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저자도 그런 면을 의식했는지 뒷부분에서 수습하기는 한다.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의 배경이 되는 근추동이라는 가상 도시는 좀 더 노골적으로 계급성을 드러낸다. 연구시설이 들어선 높은 교육수준의 지역과, 행정복지센터로 대표되는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지역으로 나누어지면서 말이다.
근추동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그 연구소 탓에 근추동은 고학력 연구원들이 사는 땅 반, 현 같은 상대적 저학력자들이 사는 땅 반으로 절묘하게 나뉘었다.
-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 중에서
보통 경제력으로 구역을 나누는 게 일반적인데, 교육수준으로 구역을 나누는 게 재밌다.
앞서 신촌과 관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도 그렇고 저자가 생각하는 지역성에 교육수준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서강대 출신)
결과적으로 (그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저자의 지역적 인식이 상당히 권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남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정점과 신촌, 관악으로 대표되는 학벌 권력은,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않으려 해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무 살까지 마산에서 살았다는 저자의 말을 보니 그 상징성을 잘 모르고 썼나 보다 싶다가도, 오히려 외부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그 상징성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굳이 저런 대비적인 배경 설정을 한 것이 적어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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